제 5권 “이건 알아두세요”
멋집니다
200. 성령의 말씀과 양심의 소리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양심의 소리에 따라 살다 보니 바보가 되는 것 같아서 속상합니다.
201. 우리나라는 사망시 부검제도가 없어서 해부학 실습용 시신이 무척 모자라는 현실입니다. 의사로서 학생 때 해부실습 대상이 되어 주신 이름 모를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같은 방법으로 보답할 생각입니다.
그런데 신체를 의과대학에 해부 실습용으로 기증하는 일이 민속적으로 부모가 주신 몸을 훼손시킨다는 의미에서 걸립니다. 또 최근의 의학 발달이 과연 주님의 뜻에 따르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 비춰 내 몸을 사랑하지 않는 결과는 아닐지 망설여집니다. 교리적으로 문제가 없는지요?
202. 학원 강사입니다. 일등만 요구하는 세상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최선을 쏟아 준비시키는 직업이 하느님을 기쁘게 하지 못할 것만 같아 고민됩니다.
203. 하루 중에 묵주기도를 10단~20단 정도 바치고 있습니다. 대략 5~6번에 나누어 바치고 있는데 이어 기도할 때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까?
204. 주위의 반대에도 천주교로 옮겼습니다. 혼자 교리를 받을 때에 외로웠지만 잘 이겨냈지요.^^ “성가는 은총이 두 배”라는 신부님 말씀에 따라 미사에서 소리 높여 성가를 부르다가 “목소리가 너무 크다”는 나무람을 들었습니다. 너무 부끄러웠고 속상합니다.
205. 교리공부를 할 때 원죄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범죄(하느님께 대한 교만과 불순명의 죄)로 인하여 생겨났다고 배웠습니다. 곧 “원조 아담이 지은 죄가 원죄라고 한다”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본당 신부님께서는 원조 아담이 범한 죄가 원죄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죄를 원죄라고 하는지, 확실한 답을 잘 모르겠습니다.
206. 사무엘기 하권 24장과 역대기 상권 21장에 의문이 듭니다. ‘인구 조사’를 한 것이 왜 주님 보시기에 악하고 역겨운 일이었는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207. 성경이 전하는 난폭하고 잔인한 장면들이 너무 비인간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문명세대에 이렇게 야만적인 이야기를 읽으며 놀라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208. 토빗 12,18의 “날마다 그분을 찬미하고 찬송하여라”는 라파엘 대천사의 당부를 읽으면서, 어떻게 날마다 찬미와 찬송을 드릴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구체적인 행동요령을 알고 싶습니다.
209. “엘리사는 (…) 주님의 이름으로 저주하였다. 그러자 암곰 두 마리가 (…) 아이들 가운데 마흔 두 명을 찢어 죽였다”(2열왕 2,24)라는 구절의 엘리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209. “엘리사는 (…) 주님의 이름으로 저주하였다. 그러자 암곰 두 마리가 (…) 아이들 가운데 마흔 두 명을 찢어 죽였다”(2열왕 2,24)라는 구절의 엘리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예언자가 아이들의 단순한 놀림에 그토록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를 수 있나?”라고 엘리사의 과잉반응에 분노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순진한 아이들에게 연민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인 동시에 ‘그 시대의 자녀’라는 점을 감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다양한 ‘문학유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특히 구약에는 법률, 족보, 목록, 예언, 경신례적 노래, 잠언 등의 고유한 작품과 신화, 전설, 영웅담, 일화, 소설, 비유 등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각각의 이야기에서 저자의 의도를 세밀히 살피는 작업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적하신 부분은 발라암과 나귀(민수 22,22-35 참조), 엘리야에게 빵과 고기를 날라준 까마귀(1열왕 17,6 참조) 이야기처럼 동화적 성격의 일화일 뿐입니다.
저자는 이 생뚱맞은 얘기를 통해 하느님 사람에 대한 경외심을 갖도록, 함부로 조롱하지 못하도록 경고한 것입니다.
당시 이 ‘작문’은 엘리사의 위대함과 능력을 세상에 알리는데 일조했겠지요.
옛사람들이 이러한 표현방식으로 위대한 인물을 경외하도록 부추겼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이 ‘이상한 이야기’를 올바로 알아 듣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