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하루 중에 묵주기도를 10단~20단 정도 바치고 있습니다. 대략 5~6번에 나누어 바치고 있는데 이어 기도할 때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까?

by 월평모힐라리오 posted Jan 1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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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권 이건 알아두세요” 

 

멋집니다

 

200. 성령의 말씀과 양심의 소리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양심의 소리에 따라 살다 보니 바보가 되는 것 같아서 속상합니다.

201. 우리나라는 사망시 부검제도가 없어서 해부학 실습용 시신이 무척 모자라는 현실입니다의사로서 학생 때 해부실습 대상이 되어 주신 이름 모를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같은 방법으로 보답할 생각입니다.

그런데 신체를 의과대학에 해부 실습용으로 기증하는 일이 민속적으로 부모가 주신 몸을 훼손시킨다는 의미에서 걸립니다또 최근의 의학 발달이 과연 주님의 뜻에 따르고 있는지 의문입니다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 비춰 내 몸을 사랑하지 않는 결과는 아닐지 망설여집니다교리적으로 문제가 없는지요?

202. 학원 강사입니다일등만 요구하는 세상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최선을 쏟아 준비시키는 직업이 하느님을 기쁘게 하지 못할 것만 같아 고민됩니다.

203. 하루 중에 묵주기도를 10~20단 정도 바치고 있습니다대략 5~6번에 나누어 바치고 있는데 이어 기도할 때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까?

204. 주위의 반대에도 천주교로 옮겼습니다혼자 교리를 받을 때에 외로웠지만 잘 이겨냈지요.^^ “성가는 은총이 두 배라는 신부님 말씀에 따라 미사에서 소리 높여 성가를 부르다가 목소리가 너무 크다는 나무람을 들었습니다너무 부끄러웠고 속상합니다.

205. 교리공부를 할 때 원죄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범죄(하느님께 대한 교만과 불순명의 죄)로 인하여 생겨났다고 배웠습니다곧 원조 아담이 지은 죄가 원죄라고 한다라고 배웠습니다그런데 본당 신부님께서는 원조 아담이 범한 죄가 원죄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무슨 죄를 원죄라고 하는지확실한 답을 잘 모르겠습니다.

206. 사무엘기 하권 24장과 역대기 상권 21장에 의문이 듭니다. ‘인구 조사를 한 것이 왜 주님 보시기에 악하고 역겨운 일이었는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207. 성경이 전하는 난폭하고 잔인한 장면들이 너무 비인간적이라고 생각됩니다이 문명세대에 이렇게 야만적인 이야기를 읽으며 놀라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208. 토빗 12,18의 날마다 그분을 찬미하고 찬송하여라는 라파엘 대천사의 당부를 읽으면서어떻게 날마다 찬미와 찬송을 드릴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구체적인 행동요령을 알고 싶습니다.

209. “엘리사는 (주님의 이름으로 저주하였다그러자 암곰 두 마리가 (아이들 가운데 마흔 두 명을 찢어 죽였다”(2열왕 2,24)라는 구절의 엘리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203. 하루 중에 묵주기도를 10~20단 정도 바치고 있습니다. 대략 5~6번에 나누어 바치고 있는데 이어 기도할 때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까?

 

하루의 시작과 잠깐의 여유까지 기도로 채우시는 형제님이 부럽습니다.
늘 깨어 그분을 기억하는 삶을 닮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정성된 기도로서 종일, 그분을 기억하여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은 충분히 주님께 기쁨의 선물입니다.
그러한 만큼 묵주기도를 하면서 의문 나는 점들에 너무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리고 묵주기도는 언제나 다시, 이어 바쳐도 무방하다는 사실을 알려 드립니다.
기도는 방법과 철칙에 묶이기보다 진심으로 바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기도는 살아계시는 주님, 이름을 부를 적마다 응답하시는 그분과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종일 사도신경에 마음이 꽃혀서 사도신경만 외워도 그릇되지 않다는 얘깁니다.
기도책이 없고 묵주가 없어도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기도에서 횟수나 시간이 아닌 마음을 보십니다.
기도에 그분의 뜻을 기리고 감사하는 고백이 담길 것을 고대하십니다.
하여 기도하는 이에게 마음에 용기를 얻고 사랑으로 결속되어, 풍부하고 온전한 깨달음을 모두 얻고 하느님의 신비 곧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갖추게”(콜로 2,2) 하십니다.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콜로 3,1)하도록 이끄십니다.
기도의 의무에 속박되지 않는, 참 자유 안에서 충실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