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리구 신앙과 말씀의 해신앙수기 공모전 최우수상

 

용서

언양성야고보성당 김인옥 모니카

 

오늘의 복음 핵심은 용서였다. 죄지은 형제를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당시 7은 완전을 나타내는 수였다니,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이 된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하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어서 하신 매정한 종의 비유를 읽으며 말씀의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죄를 탕감받고 새 생명까지 얻은 것에 비한다면 용서 못 할 죄가 무엇이겠는가. 하느님이 보시기에 별것도 아닌 작은 잘못을 용서 못 하는 인간들이 참 안타까우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시니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길 간절히 바라시는 마음에서 하신 말씀인 것 같았다.

이날 신부님의 강론 요지는 용서의 기쁨이었다. 그 예로 어린 시절의 추억 한 도막을 들려주셨다. 추운 겨울 어머니가 그리도 말리는 스케이트를 타러 개울로 갔었단다. 신나게 달리다가 그만 얼음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는데, 흔적을 지우려 모닥불을 피워 옷을 말리다 옷까지 태워버렸단다. 해가 기울고 날은 점점 추워져 맞아 죽을 각오로 집에 돌아가서는, 어머니 앞에서 다시는 안 타겠노라며 스케이트를 패대기쳐 부숴버렸단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허허 웃으시며 추우니 어서 방에 들어가 몸을 녹이라고 하셨단다. 몽둥이세례는 없었다. 용서를 받은 것이었다. 그 날의 그 기쁨이 사십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가슴에 남아있단다. 만약 당신께서 남을 용서한 일이 있었다면 그 날의 그 기쁨 덕분일 것이라 했다.

 

불현듯 먼 기억 하나가 내 머리를 스쳤다. 이 십여 년 전 가을이 오는 길목이었다. 가을의 전령사라는 풀벌레들의 노랫소리가 너무나 듣고 싶었다. 그래서 남편을 조르고 졸라 텐트를 짐 지워 금정산성 북문에 올랐다. 벌써 몇몇의 텐트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도 적당한 곳에 텐트를 치고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한 후 산보에 나섰다. 도시의 불빛이 닿는 탓이지 별빛은 그리 영롱하지 않았지만, 하나, 둘 돋아나는 별들이 정다웠고 살갗을 간지럽히는 바람은 더없이 상쾌했다. 또르르르 쓰르르르 애잔한 듯 외로운 듯 즐거운 듯 사방에서 들려오는 벌레들의 합창에 귀 기울이며 한참을 걸었다. 벌레들은 어쩌면 이 여름이 다하기 전 제 짝을 찾아 맡겨진 소임을 다 하려고 죽을 힘을 다해 소리 지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하모니를 듣는 나는 즐겁기만 했다.

문득 그들이 생각났다. 어떤 교우인데, 작은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어린 딸 셋을 데리고 길가에 나앉게 되었다는 가장이 떠올랐다. 가진 돈이 없으니 어쩔 수가 없지 않겠냐고 애써 모른 척했었는데, 왜 그 날 그 시각에 그가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얘길 남편한테 꺼냈고, 남편이 대출을 받아 빌려주기로 의견을 모았다. 공무원이라 무담보 대출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나는 더없이 행복해진 마음으로 벌레 소리를 자장가로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그를 만나, 오 년 동안 원리금을 상환하는 조건으로 이 천만 원을 대출받아 주었다. 그는 그 돈으로 가정집 한 채를 전세 내어 1층은 식당으로, 2층은 살림집으로 꾸몄다. 전세 계약도 굳이 남편 이름으로 하자고 해서 남편이 직접 계약서도 썼다.

그러나 채 반년도 지나기 전에 입금되어야 할 돈이 안 들어오기 시작했다. 남편은 월급날이면 월급의 반이 툭 잘려나간 봉투를 들고 얇아진 봉투만큼 볼이 부어 들어왔다. ‘왜 안 주지? 언제 주려나? 어쩌겠다는 거지?’ 속이 타 들어갔다. 괜한 일을 저질렀구나 싶어 후회도 되었다. 급기야 그들이 식당을 접고 이사를 갔다는 소문이 들렸다. 우리에겐 일언반구 의논이나 양해 한마디 구하는 일이 없었다. 남편 손 빌리지 않고 전세금을 어떻게 받아냈는지 모를 일이었다.

생각할수록 배신감이 느껴졌고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가 소비되는 일이었다. 지치고 힘이 들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우선 내가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받아낼 희망도 거의 없어 보였다.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 나려면 완전히 포기하는 방법밖에 없겠다는 결론에 이른 어느 날, 나는 가면 하나를 쓰고 그의 아내를 찾아갔다.

형님, 걱정 마셔요. 우리 그 돈 없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습니다. 하늘에다 저금했다 생각할게요. 그러니 갚을 생각 마시고 편히 사세요.”

십 년 체증이 내려간 듯 홀가분했다. 그의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했다.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해서 날마다 기도하겠다고도 했다. 나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그리고 잊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흐른 후 나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시골로 이사를 왔다. 그런데 이듬해 속지주의 원칙에 따라 우리는 주거지가 있는 구역의 신설 본당으로 편입이 되었다. 교구에서 성당 지을 땅도 사주고 건축비도 보태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저마다 형편 닿는 대로 건축헌금을 내기로 했다. 우리도 얼마만큼을 내기로 금액을 정했다. 그러나 당장 수중에 돈이 없으니 어떻게 마련해야 하나 이리저리 궁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예상 밖에도 돈을 빌려주었던 그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번 만나자는 것이었다. 직감적으로 돈을 좀 갚으려나 싶었다. 나는 남편에게 이미 오래전에 돌려받기를 포기한 돈이니, 오 만원을 주든 십 만원을 주든 감사히 받자고 다짐하고 약속 장소로 갔다.

예상은 적중했다. 그런데 그 액수에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우리가 건축헌금으로 작정한 딱 그 액수였다. 우리 돈을 반이라도 갚으려고 적금을 들었는데, 만기 한 달을 앞두고 해약해서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어쩐지 빨리 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었다. 눈도 안 깜빡거렸는데 내 두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듯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돈이 생겼다는 것보다 더 기뻤던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었다. 환희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다음으로 든 생각은 하느님은 신실하신 분이니 하늘을 두고 함부로 맹세해선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의 아내와 나는 서로 손을 마주 잡은 채 서로에게 감사하며 한참이나 눈물을 흘렸다. 우리 딸의 결혼식 날이 임박한 줄 잘못 알고 적금을 급히 해약해서 들고 온 것인 줄 뒤에 알았지만, 아무튼 그 날의 기쁨은 너무나 컸다.

그리고 또한 감사한 일은 그들이 이젠 걱정 없이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십 년 전에 차렸던 식당 일이 잘 안 돼서 문을 닫고, 사는 일이 막막해지니 몸도 여기저기 병이 들더란다. 엎친 데 덮쳐 중학생이던 딸아이도 원인 모를 병으로 1년을 휴학하며 병치레를 했었단다.

그런데 나의 말이 너무나 감사해서 다시 힘을 내서 살게 되었고, 건강도 점점 회복되었단다. 딸아이도 복학을 해서 중학교를 잘 마쳤고, 대학까지 졸업해서 괜찮은 직장에 잘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 또한 참 기쁜 소식이었다.

 

또다시 10년이 흐른 오늘, 신부님 강론을 들으며 불현듯 깨달았다. 그 날의 그 기쁨의 원인에는 내가 미처 몰랐던 또 하나의 이유가 더 있었다는 것을. 그것은 바로 내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이었다. 여태까지 내가 그들을 용서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잊고 있었을 뿐 그들을 결코 용서한 건 아니었다. 내 잠재의식의 밑바닥에는 그들에 대한 원망이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죄의식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이 돈을 내미는 순간, 나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믿는 그들로 인해 내가 용서받은 것이었다. 내가 썼던 거짓의 가면이 용서받았고, 나도 나를 용서함으로써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애써 망각 속에 묻으려 했던 그들에 대한 기억은 그때부터 행복한 추억이 되었다.

나도 그 날의 용서의 기쁨 덕분으로 조금 더 너그러운 사람으로 변모되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주 조금은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자란 것 같다. 성경은 어쩌면 나를 위해 남을 용서하라고 가르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거짓으로 한 용서도 기쁘게 쓰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용서는 용서를 낳았다. 그 용서는 물결처럼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가고 있으리라. 기쁨 가득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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