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복음 9~10장은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서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일을 싫어하는 지도자들이 장악하던 곳이기에, 벌써 세 차례나 ‘사람의 아들이 거기에서 죽임을 당할 것’(마르 10,33-34 참조)이라는 치명(治命)을 스스로 밝히셨음에도 불구하고 동행했던 제자들은 자리다툼으로 스승의 행보를 어지럽힙니다. 죽으러 가는 스승 뒤에서 자기는 이기고 세우고 움켜쥐느라 질척대는 발걸음을 스승께서는 멈추어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십니다.”(마르 10,42)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4)
욕구가 육신에 담긴 본능이라면 욕망은 마음에 박힌 뇌관입니다. 욕구는 절대적이지만 욕망은 상대적입니다. 그러기에 욕망의 대부분은 남들이 원하는 것을 자신에게 주입하고 조작하여 나아가 욕망을 채우면 행복해질 것이라 왜곡하지만, 욕망을 완전한 수준으로 충족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에 누군가는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단정 짓기에 이릅니다.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소위 상위 계층의 욕망을 흉내 내며 동류의식을 느끼기 위해 욕망을 욕망하고, 브랜드화되어 있는 욕망을 ‘소비’하느라 생명은 지속적으로 종속당할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이 세상은 갈수록 영리하게 타인의 욕망을 내가 욕망하도록 부추깁니다. ‘참으로 나에게 이것이 필요한가?’
참으로 청해야 할 것은 타인의 욕망이 아니라, 스승께서 몸소 보여주신 것처럼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는 ‘자기 이유’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채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비움을 통하여, 높음의 성취가 아니라 낮음의 선선함을 통하여, 차라리 내가 부수어지고 말겠다는 결연함의 밀도가 ‘모든 이의 종’이라는 선포 속에 농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면, 희생과 섬김을 내 인생에 담아야 합니다. 비록 한평생 욕망의 바다에서 시달린다 할지라도, 우리는 기어이 한 척의 배를 띄울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을 ‘불쾌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연민으로 가까이 불러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마르 10,43) 다시금 바로 잡아주시던 하느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통하여 당신 구원역사를 이어가실 것임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