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일 <주님의 뜻을 응원합니다.>
(2021. 8. 29 신명 4,1-2.6-8; 야고 1,17-18.22.27; 마르 7,1-8.14-15.21-23)
“세상이 왜 이럴까요?” 요즘 신자분들께 흔히 듣는 얘기입니다. 콕 집어서 과연 세상이 왜 이런지 설명할 재간이 없으니 갑갑하기도 합니다. 더위에 뒤척이던 새벽, 밀쳐놓았던 질문들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일어나 성경을 폈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루카 9,44). 한동안 그 말씀에 골몰했습니다. 오늘 듣는 모세의 간곡한 당부가 더욱 절실히 들려왔습니다.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이제부터는 “세상이 왜 이럴까요?”라는 물음에 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사제에게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세상의 애도를 멎게 하는” 사명이 있으니까요. 세상의 모든 불안을 다독여 편안히 “잠들게 해 주는 자장가”처럼 모두가 주님의 평화를 누리도록 돕는 것이 마땅하니까요. 저는 이제 분명히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꼭 당신이 계획하신 세상을 만들어 가십니다. 저는 그것을 굳게 믿습니다”라고요.
성경은 오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언제 어디서 선포되었는지 소상히 밝힙니다. 장소는 “요르단 건너편 아라바에 있는 광야”였고 이집트를 탈출한 지 “사십 년째 되던 해 열한째 달 초하룻날”이었다고 분명히 기록해 두었지요. 아마도 이 일이 주님께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솔직히 주님께서 주신 계명은 딱 열 개뿐입니다. 그런데 열 가지에 불과한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기가 왜 이리 힘이 든 것일까요? 어째서 주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걸 그토록 버거워하는 것일까요?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 삶에 하느님의 탄탄한 울타리가 생기는데 말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서 살아가기만 하면 참 행복이 보장되는데 말입니다. 딱 열 가지만 지키고 살아가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라는 약속까지 해주셨는데 말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이 복된 길에서 주저하게 되는 것일까요?
저는 예수님의 사랑을 딱 열 개의 계명에도 쩔쩔매는 인간의 허약함을 충분히 헤아려 단 두 가지로 축약시켜주셨다는 점에서 뚜렷이 느낍니다. 오직 사랑을 살아낼 수 있도록 단순화시켜주신 사실에 감격합니다. 이야말로 못난 우리의 편이 되시어 아버지께 맞선 도발적 사랑이라 감히 생각해 봅니다.
그러기에 신자분들의 질문이 주님의 사랑을 의심할 때, 사제는 속이 상합니다. ‘정말로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지만’이라는 단서가 붙을 때, 당혹스럽습니다. ‘이번 일만 해결해주시면’이라는 조건이 달릴 때 속이 쓰립니다. 모두, 주님의 뜻을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니 그렇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가 오직 건강하고 오래 살면서 흥청망청 돈을 써대는 것에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선물해 주신 삶의 목표가 다만 이 세상에서 근심 걱정 없는 것에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굳이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창세 이래 그런 소망을 위해서 생겨난 종교는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비웃고 주님의 사랑을 타박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맞서셨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모두 꿰고 있는 양 으스대던 그들의 위선과 오만을 모른 척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왜곡시켰던 그들의 거짓과 철저히 각을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달리 대하십니다. “고작 열 개 사항을 지키는 게 뭐 그리 힘이 드느냐”고 야단치지 않으십니다. “그저 사랑만 하면 되는데 무얼 그리 어려워하느냐”고 꾸짖지 않으십니다. 그저 ‘내 탓’이라 하시며 끝없이 용서하시며 당신의 희생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성경을 짜고 짜고 또 꽉꽉 짜내보면 남는 것은 사랑뿐이라는 얘기가 진정 참이라 믿어집니다.
오늘 독서에서 선포되는 모세와 야고보 사도의 권고는 하나입니다. 믿음은 그분의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듣는 일에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 영혼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며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분의 복음을 알면서도 자기 좋을 데로 무엇을 보태거나 자기 편의에 따라 조절하려는 것은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으로 추락할 것이라는 지엄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이제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목적이 무엇인지 고민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추상적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하여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는 일”에 감사드리며 세상이 추구하는 ‘헛된 욕심’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심어 키우기 위해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에서나 하느님의 방법만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기를 원합니다.
이래저래 혼란한 세상이지만 주님의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통해서 바로 지금, 당신의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늘 선하신 주님의 뜻을 응원해 드립시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끝까지 사랑하므로 그분의 편이 되어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