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도구

가톨릭부산 2021.08.25 10:18 조회 수 : 21

호수 2666호 2021.08.29 
글쓴이 김추자 율리아 
주님의 도구

 
김추자 율리아 / 중앙성당, 교정사목 봉사자


 
   빛미용인회는 미용인들이 필요한 곳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 중 교정사목과 함께 봉사하고 있는데, 하루는 교정담당 수녀님께서 불쌍한 사형수의 부모가 되어줄 분을 찾는다는 말씀을 하셨다.  어렵게 말씀을 꺼내셨음이 분명하기에 한참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형수의 양어머니를 자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무거운 마음을 안고 구치소에서 처음 사도요한을 만났을 때 깜짝 놀랐다. 사형수라기에 흉악한 이미지를 먼저 떠올렸는데, 나의 예상을 깨고 순박하고 건실해 보이는 보통의 청년이 자리해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이는 삼천포의 한 공장에서 일했는데 임금을 8개월째 지불하지 않는 사장에게 임금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너같이 오갈 데 없는 놈 잠재워주고 밥 먹여 주면 되었지 무슨 월급이냐’는 핀잔이었다. 고아의 굴레를 씌우고 바라보는 사회와 그 사회의 인식을 이용하여 자신을 착취하려는 젊은 사장에게 화가 난 요한이는 바로 그날 공장 내 자신이 잠자던 곳에 불을 질렀다. 그런데 그 사장이 그곳에서 잠을 자다 변을 당했다. 사람을 죽이려고 방화한 건 아니라며 울먹이는 요한이를 보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만남과 기도로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1997년 12월 30일. 요한이의 사형집행이라는 갑작스런 비보가 들려왔다. 구치소에 달려가서 시신을 인도받아 구급차의 도움으로 영락공원으로 향했고, 화장 절차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이 세상 고통과 죄를 모두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편히 잠들기를 지금도 기도드린다. 그날 이후 교정사목 수녀님, 봉사자와 함께 국회의사당 앞에서 사형폐지운동을 했고 수많은 목소리와 기원들이 모여 현재 우리나라는 24년째 사형집행을 시행하지 않고 있다. 그 마지막 사형집행이 1997년 시행되었고 요한이는 마지막 사형수 중의 한 명이었다.
 
   지금도 요한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모든 걸 주님께 의탁한다 하면서도 사형수라는 이름의 무게에,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끝의 장막에 매 순간 짓눌리는 요한이를 위해 바라보고 기도하고 손을 잡아주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결국 ‘내’가 요한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오로지 주님만이 모든 것을 이루신다는 진리를 느끼며 요한이의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주님! 당신의 도구 되게 하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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