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승천 대축일 <저희를 위하여>
(2021. 8. 15 묵시 11,19.12,1-6.10; 1코린 15,20-27; 루카 1,39-56)
승천,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이 일은 너무나 특별한 일이고 별난 사건이라서 지난 옛날이야기처럼 듣고 케케묵은 고리짝에 담긴 신화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귀천이라면 어떻습니까? 모두가 돌아가야 할 곳, 어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 이후에 가는 그곳은 우리의 고향이 있는 하늘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기에 승천이라는 단어보다 귀천이라는 뜻이 훨씬 정겨운 것도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지으시고 인간을 땅에 내려와 살게 하신 이후 이 세상에서 살던 모습 그대로 하늘에 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날 이때까지, 산 채로 하늘로 올라간 사람은 에녹과 엘리야 예언자 단 두 분이라는 사실을 전하는데요.
한편, 땅에서 죽음을 맞은 이후에 땅에 묻힌 채로 남아있지 않고 하늘에 오르신 분은 세분이십니다. 그 첫째가 모세이고 다음이 예수님이시고 오늘 우리가 승천을 축하드리는 성모님이십니다.
교회의 많은 학자는 묵시록이 전하는 난해한 예언을 풀이하고 숨겨진 비밀을 캐내려 큰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덕분에 많은 신자 분들께서 성경 공부를 하고 큰 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와는 좀 다른 열심으로 묵시록의 의미를 캐내려 애를 쓰는 분들이 많습니다.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이단의 설교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이 요한의 묵시록이라는 사실을 아마 아시리라 싶습니다. 이리 끌어 붙이고 저리 이어 놓으면서 그럴듯한 감언과 이설을 각색하는 데에는 그 뜻이 감추어져 있는 묵시록만큼 좋은 책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오늘 자신이 이사야에게 예언된 여인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던 마리아. 요한의 묵시록에 드러난 자신의 천상 모습을 전혀 몰랐던 마리아를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아는 것, 배우는 것, 파헤치고 분석하는 것 다 좋은 일이고, 중요하고 필요한 작업이지만 그것이 꼭 믿음을 살고 사랑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더 월등한 방법은 묵묵히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뜻을 곰곰 새기며 그저 그분을 매 순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솔직히 에녹은 물론이고 엘리야 예언자도 성모님께서도 묵시록의 난해한 예언을 깨닫고 이해해서 승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그분들이 남보다 지식이 빼어나고 하느님의 말씀에 특별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느님을 믿되 철저히 믿었고 하느님을 따르되 철저하게 따랐던 것이 다른 이들과 유별했습니다.
믿음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져야 하며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그분을 모시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조차 없던 때 에녹은 단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면서 아들딸들을”(창세 5,22) 낳은 것뿐이었는데도 죽음을 겪지 않고 곧바로 승천했습니다. 에녹의 승천 이유는 ‘하느님과 함께’했다는 사실 뿐이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고생 또 고생 말도 못 하는 고생을 다 하면서도 한결같이 하느님의 일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 예언자의 강점은 그 무엇보다도 옳잖은 세상을 보면서 하느님만큼 속상해했던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삶도 죽음도 고픔도 채움도 모두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만으로 살았고 억울하고 견딜 수 없을 때조차 “두려운 나머지 일어나 목숨을 구하려고” 도망을 갔을 때마저도 결코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으니까요.
오히려 “주 만군의 하느님을 위하여 열정을 다해 일해 왔습니다”(1열왕 19,10)라고 고백하면서 “저는 제 조상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느님께 너무너무 죄송해했던 사람이니까요.
하느님께서 눈여겨보시는 삶은 별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삶이 부자요 권력가요 명예나 학식이었다면, 당신의 아들 예수를 그렇게 살아가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모습은 우리 삶 안에서 하느님을 밀어내지 않고 모셔 들이는 일입니다. 우리의 살림살이를 그분과 의논하고 우리의 자녀를 그분께 맡겨 드리고 틈만 나면 그분과 속살대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별 볼 일 없었던 나자렛, 그 작은 시골 살림을 하면서 예수님을 먹이고 재우고 챙겼던 엄마 마리아처럼 내내 내내 그분과 지내는 일입니다.
내내 내내 그분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 안에 하느님을 모신 까닭에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자신 안에 하느님을 모신 까닭에 섣불리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자신 안에 하느님을 모신 까닭에 어느 때에도 어디에서도 당당합니다.
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하느님께서 참으로 바라는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모세를 생각하며 배우고 주님을 생각하며 따르고 또 성모님을 생각하며 닮아 갈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에 대하여
예수님의 구원에 대하여
그분의 자비에 대하여
그분의 기다리심에 대하여
머리로 아는 것만큼 변화된 삶을 살아낸다면
주님의 뜻을 온 힘을 다해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답은 뚜렷하고 선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성모님의 승천을 알려주시며 우리를 다독여 주십니다.
이는
우리가 모두 승천하도록 하기 위하여
들려주시는 격려라 싶습니다.
우리가 모두
승천을 꿈꾸는 삶을 살아가도록 부추기심이라 믿습니다.
성모님
저희 모두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