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3주일 <믿음의 열쇠로 축복의 문을 여세요>
(2021. 6. 27 지혜 1,13-15.2,23-24; 2코린 8,7.9.13-15; 마르 5,21-43)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려 내신 현장의 상황을 들려주며
우리 기분을 한껏 고무시킵니다.
생각할수록 멋지고 대단해서 뭐니 뭐니 해도
“이 맛에 주님을 믿는 것”이라 싶어 괜스레 우쭐해집니다.
우선 그날 주님을 찾은 회당장의 모습이 남다른 점이 눈에 띕니다.
언뜻, 갖은 문제를 주님께 기도드리되,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내 마음에 들도록, 나에게 유리하게 처리’해 줄 것을 ‘요구’하는
우리 모습과 비교되더란 겁니다.
그날 주님께서 두말없이 야이로를 따라 나서도록 한 것은
하느님의 권능에 관하여 한 점 의심하지 않았던
회당장의 믿음의 순도 덕분이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을 향한 믿음에는 꼼짝하지 못하고
두 손 들고 항복하시며
더더욱
그분께 합당한 겸손의 예를 갖추어 아뢰는 모습에서는
마음이 무너져 감격하신다는 사실을 틀림없이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날 야이로 회당장이 주님을 모시고 가던 중에
망측한 상황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개운치 않습니다.
어떻게 주님께서 함께 계신데
그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는지 의아합니다.
왜 주님께서는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조처하지 않으셨는지 의문입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라는 전갈에
그날 회당장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틀림없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더욱이 사람들이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라며
더 이상 주님을 모실 이유가 무엇이냐고 말했을 때
무안했을 것도 같습니다.
체면을 팽개치고 헐레벌떡 그분께로 달려갔던 꼴이,
스스로 초라하고 비참해져서
주님을 향한 믿음에 균열이 일어났을 지도 모릅니다.
그날 회당장에게 가장 큰 딜레마는
주위 사람들이 권하는 세상적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추정해 봅니다.
이제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어서 이성을 찾고 지식인의 냉정을 되찾아 대처하라는
지적 권고를 무식하게 물리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서 회당장의 “체면을 갖추라”고
“제발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주시하라”는 당부도
거절하기 힘든 사랑의 권면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그 상황을 지켜보시며
주님의 마음이 조마조마했을 것이라 짚어지는 이유입니다.
때문에 얼른, 야이로의 믿음이 졸아들기 전에 어서,
믿음이 흔들리기 전에 재빨리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고 부탁하셨던 것이 틀림없다 싶습니다.
‘이제는 모두 끝장났다’고 결론 내리며
직면한 사건과 상황에 순응하여
‘죽음의 장례식’을 준비하라고 권하는 세상지론은 두텁습니다.
그에 움찔,
기가 질려 믿음으로 도전하기를 포기하는 우리에게 외치십니다.
백 번을 더,
천 번을 더,
‘아직’ 끝나지 않은 당신의 권능을 믿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자꾸 어긋나는 사건 안에도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의심치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우리의 허약한 믿음을 돋워주십니다.
문제가 더 불거지고 커졌는데
‘뭣 하러 더’ 주님을 모시느냐는
사탄의 힐책에 흔들리지 말 것을 강권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언제나 모자란 듯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를 캡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셔도 얼마든지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간결히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의 현장처럼 깜깜한 절망과
슬픔과 아픔에 사로잡힌 세상을 위해서,
숨 막히는 현실에 갇혀 용기를 잃은
우리를 위해서 벌써부터,
이미 생명의 빛과 능력을 준비해 두셨다는 뜻입니다.
이 믿어지지 않는 일을 희망하는 것이 믿음이며
이 믿을 수 없는 일을 믿는 것이 믿음임을 깊이 새깁니다.
때문에 오늘 야이로의 믿음이
그분께 얼마나 귀한 모습인지를 배웁니다.
믿음이야말로 아주 큰 능력이며
주님을 움직이도록 하는 매우 강력한 힘이라는 사실을 가르침 받습니다.
믿음이 하느님의 능력을 꺼내는 열쇠라는 걸 깨달았으니,
야이로처럼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가리라 다짐합니다.
그리고 이 복된 비밀을 널리 소문내리라 작정합니다.
“탈리타쿰”하시며 우리를 일깨워주신 주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