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 같은 인생
윤경일 아오스딩 / 좌동성당 의료인 ykikhk@hanmail.net
언제 자신이 늙어가고 있음을 느끼게 될까? 신체적으로 기력이 떨어질 때, 전날 있었던 일이 생각나지 않을 때, 주변에 관심과 흥미가 없어질 때, 혹은 자꾸 꼰대짓을 하게 될 때일까?
나이 든 사람이 훈계조로 말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더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해서 지위가 낮거나 어린 사람에게 강요하는 태도를 보일 때 꼰대라는 말을 듣게 된다. 지금 세상은 나이가 많다고 지식적으로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다. 컴퓨터, AI, SNS, 플랫폼 생태계 등 IT 매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젊은 층이 훨씬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있다. 고리타분한 생각으로 젊은이들을 가르치려는 것은 큰 오산이다.
장년기 이후 삶의 방향은 어디에 두어야 할까?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경륜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늙는다는 것은 소외와 단절의 과정이 아니라 베풀고 내어주는 새로운 관계의 열림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이가 들면서 활용해야 할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다.
이제는 뺄셈의 삶을 살아야겠다. 젊었을 때는 꿈과 희망을 찾아 앞만 보고 나아갔지만 그럴 때는 지났다. 기대 욕구를 줄이면 일상이 결코 작게 느껴지지 않는다. 비우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또 상실의 기술도 터득해야 한다. 경제력이 줄고, 신체도 허약해지고, 기억력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때가 되었다. 이것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쌓는 것에만 길들여져 잃어버림을 수용할 줄 모르면 자칫 우울증에 빠질 수 있다. 상실의 삶을 껴안는 것을 두고 에머슨은 ‘아름다운 필연’이라 표현했다. 상실을 통한 지혜를 깨닫는 것이 인생 후반기의 가장 큰 수업이다.
나이 드는 것을 축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분명 새로운 기회임에 틀림없다. 마음의 중력이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 관조하는 자세는 작은 것을 더 크게 바라볼 수 있다. 책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서 노교수 모리는 이 시기를 두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시간을 내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헌신하고, 창조적인 일에 헌신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물은 늙을수록 초라하게 변하지만 호박은 반대다. 늙어갈수록 그 맛이 깊어진다. 죽을 끓여 먹어도 맛있고 전을 부쳐 먹어도 맛있다. 사람도 호박을 닮아야겠다. 그래서 늙은이에게 호박 같다는 말은 아름다운 표현이다. 한번 사는 인생인데 자신만의 틀에 갇혀 지내지 말고 호박처럼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