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주일 말씀 당겨 읽기

부활 제6주일 <기도, 하늘을 움직이는 리모컨>

(2021. 5. 9 사도 10,25-48; 1요한 4,7-10; 요한 15,9-17)

 

한동안 분주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읽을 요량으로 밑줄을 긋고 책 귀를 접었던 묵은 책들을 정리했거든요. 쌓인 책을 다시 꺼내 읽는 일은 극히 드므니 과시용에 불과했다는 자책이 일었던 겁니다. 이참에 간소한 삶으로 한 발 디딘 느낌에 홀가분했습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 이 많은 책들이 삶의 버팀목이었다 싶더군요. 좋은 글을 읽으면 나도 좋은 글을 쓰고 싶었고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요. 더러 젊은이의 욕망이기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글을 갖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바라본 적도 꽤 많았으니, 이 헌 책들은 제 꿈의 조각이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그냥 폐지로 넘기는 게 아쉬웠습니다. 궁리 끝에 신자분들과 나눌 생각을 가져봅니다. ‘헌책을 드리는 게 조심스럽지만 제 나름의 검증을 거친 책인 만큼 읽는 분들께도 은혜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헌책 속, 갈피에 숨어있는 아름답고 귀한 글들이 새로운 향기로 피어나기를 원해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명령하십니다. “서로 사랑하여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그러고 보니 사명이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의미가 묵직이 다가오는데요. 한문의 使 사람의 목에 칼이 걸린 형상이며 은 목숨을 뜻합니다. 사명이란 목숨을 걸고 꼭 해내야 하는 일이라는 의미인데요. “서로 사랑하여라는 주님의 명령은 흘려 들어서도 안 되고 허술히 지나칠 수도 없는 엄청 중요한, 꼭 실천해야 하는 의무라는 걸 명심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신자들의 기도 보고서입니다. 초대교회가 주님께서 주신 명령을 목숨 걸고 지켜낼 수 있었던 저력은 오직 기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증언으로 가득하니까요. 덕분에 우리는 초대교회 신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을 불문하고 모여서 기도드렸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데요. 특히 오늘은 제 1독서의 인물, 코르넬리우스에게 주목해 봅니다. 성경은 이탈리아 군대의 백인대장코르넬리우스가 어떻게 하느님을 알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하느님을 향한 깊은 신심으로 온 집안이 하느님을 경외하도록 하여 함께 기도하며 지냈다고 증언합니다. 더해서 이방인이었던 그가 유다 백성에게 두루 자선을 베풀었으며 성실하게 그분의 뜻을 실천했던 인물이라고 전합니다.

그날, 주님께서는 이 독특하고 어여쁜 이방인의 신심에 감동하시어 부랴부랴 천사를 파견한 것이라 싶습니다. 서둘러 이웃 동네에 머물던 베드로 사도를 특파하신 것이라 싶습니다.

 

그날 주님께서는 이방인 코르넬리우스를 방문하라는 깜짝 사명을 베드로 사도에게 내리셨습니다. 그 명령은 베드로 사도가 어안이 벙벙해할 만큼 의외의 것이었는데요. 이처럼 주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순수한 아이디어로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오늘 우리를 통해서 온 세상이 깜짝 놀라탄성을 지를 바로 그 일을 이루려 하신다는 걸 일깨워주십니다. 오늘 이 순간에도 우리의 기도를 몹시 기다리신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요. 그날 베드로 사도가 시장해서 약간 분심이 들었다는 사실도 재밌는데요. 그러고 보면 우리의 기도가 밤을 지새우는 열심한 기도가 아니라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라 싶습니다. 버릇처럼 입에 붙은 기도를 암송하는 것에 그친다 해도 괜찮다 싶습니다. 그분께서는 봉헌되는 기도를 모두, 전부, 깡그리 당신 은혜로 응답해 주시는 분이시니 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늘을 움직일 수 있는 기도의 리모컨을 선물하셨으니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세우는 축복의 열쇠가 우리 손안에 주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간절하고 진솔한 기도는 악에 갇혀 신음하는 세상 영혼들을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묶인 것을 풀고 꽉 잠긴 문을 열게 합니다.

전혀 일면식이 없던 코르넬리우스와 베드로 사도를 맺어주신 그분께서는 오늘 우리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전혀 모르는 누군가를 기도로 돕기 원하십니다. 이웃을 위한 우리의 기도 때문에 천사를 파견하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베드로 사도처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선교의 장을 넓히기 원하십니다.

 

부활 제6주일, 골라낸 책무더기를 보며 예수님의 사랑이 떠올랐습니다. 먼지 앉고 때 묻어 꼬질꼬질한 헌 책 같은 우리를 추하다하지 않으시는 분, 누더기 같은 우리 삶의 옹이를 속속들이 읽고 살펴 털고 씻고 헹구어 새롭게 단장해주시는 분의 은혜를 기억했습니다. 우리의 낡은 삶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죄를 꼼꼼히 털어내고 고쳐 새 사람이 되게 하심에 감격하였습니다.

성모성월입니다. 은혜의 때입니다. 스스로 생각에 갇혀 웅대한 그분의 꿈을 외면하지 않기 바랍니다. 기도의 사명에 충실하여 주님의 사랑에 젖어드는 은총을 누리기 원합니다. 하여 성모 어머님께 기쁨을 드리는 귀한 자녀로 돋움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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