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출처 : 천주교 수원교구 영성관 관장이신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중에서 일부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으로 순교하게 된
많은 아기 순교자들을 기념합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왕권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
베들레헴의 2살 이하의 아기들을 죽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 어린 아기들을 죽지 않게 할 수 있지 않으셨을까요?
만약
동방박사들이 헤로데에게 들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요?
하느님께서는
굳이 별이 사라지게 만들어
동방박사들이 헤로데를 찾아가
새 왕이 태어난 곳을 물어보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아기들의 죽음의 근본적인 책임은
하느님께 있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물론
아기들을 죽게 만든 것은 헤로데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하느님은
빛에 대한 악의 세력의 반격에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당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희생 없이는 살아있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죄한 아기들의 순교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부모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간과 하느님의 생명을 누립니다.
그런데
이 피의 대가로 사는 우리는
그 피에 대한 빚진 마음을 제대로 갚지 않으면
온전한 생명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피를 흘리신 분들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죄 없는 아기들이 왜 죽어야 했을까요?
이는
어쩌면 우리가
모두 누군가의 피 흘림으로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모세가 살아남아야 했을 때도
많은 아기가 물속에 던져져 죽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 중 어떤 누구도
부모의 피 흘림 없이 태어나고 자란 사람은 없습니다.
어머니의 피 흘림으로 태어났고
아버지의 피 흘림으로 자랐습니다.
우리 안에는
그렇게 누군가를 피 흘리게 했다는 죄책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부모의 나를 향한 피 흘림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또 자녀를 위해 피를 흘려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해결하는 방법은
나도 아버지처럼
동생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것뿐입니다.
이 마음을 주기 위해
누군가는
반드시 나의 생존을 위해 죽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법칙이기 때문에 어김이 없습니다.
만약
내가 또 누군가를 위해 피를 흘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피를 흘려주신 것에 대한 죄책감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의로움’입니다.
오늘 죄 없는 아기들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태어남 때문에 죽은 그들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다른 것으로 그 죄책감을 잊으려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들과 똑같이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서
그들을 기쁘게 보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물론 그 아이들의 피 흘림은
그리스도를 향한 아버지의 피 흘림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그 피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어쨌건
우리도 그리스도의 피 덕분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우리가 피를 흘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담처럼
또 그분 십자가 앞에서 숨어야만 할 것입니다.
죄 없는 아버지의 희생으로 살게 된 자녀가
동생을 구하기 위해 자신도 피를 흘릴 수 있었을 때
그 죄책감이 사라진 것처럼,
우리 또한
죄 없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죄책감을
이웃의 죄를 덮어주기 위해 피를 흘릴 수 있을 때
사라질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피로 받은 생명은 피로만 갚을 수 있고
그 때야만
나를 위해 피 흘린 분을
죄책감 없이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런 희생으로
아기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듯이,
우리의 피 흘림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됩니다.
그래야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