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8 14:12

가정교리 39과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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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리 제 39 과 - 부활의 기쁜 소식은 어떻게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나요?

 

《다음 성경 구절은 부활에 대해 알려 주는 가장 오래된 구절이에요.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4-7)

 

복음사가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일들도 전해 주어요. 무덤이 있던 정원에서, 호숫가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이 모여 있던 다락방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모든 이는 너무나 놀랐어요.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바로 깨닫게 되었어요.

 

요한 20,11-18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

 

루카 24,13-35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요한 21,1-14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요한 20,19-29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예수님과 토마스’》(『Youcat 프렌즈』p.76-77)

 

본문에 나오는 네 가지 이야기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하여 성경을 찾아서 함께 읽고 서로의 생각이나 느낀 점을 나누어 봅니다. 자녀들이 원하면 다른 이야기들도 더 찾아서 읽고 나누셔도 됩니다.

 

요한 20,11-18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혼자 예수님의 무덤에 갔고,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습니다.(요한 20,1) 그래서 마리아는 이 사실을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렸고,(요한 20,2) 이 두 제자는 무덤으로 달려가서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요한 20,3.10)

 

하지만 마리아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무덤 밖에 서서 혼자 울고 있었습니다.(요한 20,11) 그리고 동굴 속에 앉아 있는 두 천사를 보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미 집으로 돌아가 버렸기에 볼 수 없었지만, 마리아는 계속 머물러 있었기에 천사들을 볼 수 있었고, 그들과 대화도 나누게 됩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요한 20,13) 하고 묻자, 마리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13)

 

여기서 눈여겨봐야할 것은 ‘저의 주님’ 이라는 마리아의 표현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직접 두 눈으로 보았고, 예수님을 이 무덤에 모신 것까지도 보았습니다. 이미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돌아가신 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느냐’는 질문에 그냥 있는 그대로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꺼내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시신’이라는 표현 대신 ‘저의 주님’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아직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그저 ‘돌아가신 분’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마리아가 돌아가지 않았던 아니 돌아갈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여기서 ‘찾느냐’ 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ζητέω(zeteo)는 ‘찾다’라는 뜻도 있지만, ‘갈망하다’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물음은 ‘누구를 찾느냐?’도 되고, ‘누구를 갈망하느냐?’라는 질문도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향한 마리아의 사랑의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마리아가 무덤 앞에 서서 흘리는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저 단순히 시신이 없어져서, 누가 어디로 꺼내갔는지 모르니 답답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마리아는 여전히 예수님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때까지도 유다인들에게 잡힐까봐 두려워서 시신이 없어진 것만을 확인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버렸지만, 마리아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갈망이 그녀에게는 변함없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자 혼자 어두운 새벽녘에 무덤가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지만, 마리아는 그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대화를 나눕니다. 사도 요한은 훗날 그의 편지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