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6 11:02

가정교리 38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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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리 제 38 과 - ‘부활하다’라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부활하다’라는 말은 누군가 분명히 죽었는데 하느님이 그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어 되살아났다는 것을 뜻해요.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 일어난 놀라운 일이에요. 죽으셨던 예수님이 제자들과 여러 다른 이들에게 살아 계신 모습으로 나타나셨어요! 그분은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드시고 제자들에게 당신의 몸을 직접 만져 보라고도 하셨어요. 부활하신 예수님은 언제나 항상 살아 계셔요.

 

이 밤에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사슬을 끊고 부활하시어 저승에서 승리하여 오르셨나이다!》(『Youcat 프렌즈』p.74-75)

 

부활이라는 말은 죽은 사람의 영혼과 육신에 생명을 되돌려 주시는 하느님의 기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그분이 묻혀 계셨던 무덤이 비어 있었던 사건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빈 무덤을 발견한 것 자체가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후에 제자들은 빈 무덤에 관한 사건을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네 복음서를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여러 가지 형태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곧바로 알아보지 못했고, 알아차리자마자 예수님께서 갑자기 사라져 버리기도 하셨으며, 제자들이 숨어 있던 집의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 그 안으로 들어오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보통 사람처럼 걷고 말하고 먹고 마시며 제자들에게 당신을 만져볼 수 있게도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 같은 분이시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확인시켜 주는 사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잠겼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세상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믿음의 확실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께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메시아로 영광스럽게 들어 올려지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 실현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써,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 시작하셨고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구원 사업을 완성시켜 주셨습니다.

 

요한 복음서는 예수님의 빈 무덤 사건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져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제자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요한 10,1-10)

 

이 본문에서 부활을 의미하는 ‘다시 살아나다’라는 단어는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다’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무려 네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활’과 ‘보는 것’이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말로는 네 번 다 ‘보다’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그리스어 원문을 보면 세 개의 다른 단어가 쓰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들의 뜻이 무엇이고, 어떤 경우에 사용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부활의 의미를 깨닫는 핵심 작업이 될 것입니다.

 

맨 처음 쓰인 단어 ‘βλεπω’(blepo)는 우리의 감각적인 시각으로 뭔가를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우리 눈에 들어오는 대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 쓰인 단어 ‘θεωρεω’(theoreo)는 우리의 지성과 의지로 뭔가를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눈에 들어오는 대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지를 가지고 그것을 바라보고 또 본 것에 대해 지성적인 작업을 하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마지막으로 쓰인 단어 ‘ὁραω’(horao)는 우리의 내면에서 영적인 차원으로 뭔가를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감각적 차원, 지적 차원을 넘어서서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뭔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묵상’ 혹은 ‘관상’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제 이 단어들이 어디에 쓰였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본 것,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가 무덤 밖에서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본 것에 ‘βλεπω’가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제자는 그냥 감각적인 차원에서 눈에 들어온 대로, 빈 무덤과 아마포를 본 것입니다.

그 다음, 시몬 베드로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본 것에 ‘θεωρεω’가 쓰였습니다. 베드로는 그냥 아마포를 본 것이 아니라, 정돈되어 있는 아마포와 수건을 보면서,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제자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고 할 때 ‘ὁραω’가 쓰였습니다. 이 다른 제자는 처음에 무덤 밖에서 그냥 눈에 들어오는 대로 아마포를 보았지만,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아마포를 보고, 단순히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간 것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넘어서, ‘예수님께서 정말 살아나셨구나.’ 라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 다른 제자는 빈 무덤 안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활 신앙’입니다. 감각적인 눈으로 본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지적인 차원을 넘어서 영적인 차원으로 보고 믿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도 우리의 육신적인 눈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감각적인 차원에서 보는 빈 무덤은 결코 부활을 깨달을 수 없고, 지적인 차원에서 보는 아마포도 부활의 신비에 다다를 수는 없습니다. 오직 내면의 눈으로, 영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는 빈 무덤과 아마포만이 우리를 부활에 대한 믿음에 다다르게 해줍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고 죽으셨으며 부활하신 분으로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당신 제자들의 믿음을 통해서만 인류에게 오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은 계속해서 조용히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우리가 그분께 자신을 개방하면 그때 서서히 우리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외적 힘으로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주고 사랑을 선사하며 일깨우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방식이 아닐까요?”(『나자렛 예수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