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 5주일 부주임신부님 강론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두 가지 메시지를 던져주고 싶어합니다.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리신 첫 번째 이유는 당신께서 생명을 주관하시고, 믿는 이들로 하여금 당신이 참 생명의 주인이라는 것을 계시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라자로를 살리시는 장면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도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집중되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말씀입니까? 얼마나 큰 은총으로 다가오는 말씀입니까? 부족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닌 우리, 하느님과 이웃과 그리고 스스로에게 죄를 지어 살아가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주어진다니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과 죄의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즉시 기쁘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고백의 진실성은 우리를 예수님의 생명과 부활이라는 장으로 초대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자격이 있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지만 자격이 주어졌다 해서 거저 얻어질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답은 오늘 복음에 있습니다.
하나는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한 마르타의 고백입니다. 우리 역시 마르타처럼 예수님을 주님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메시아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일상 안에서 자주 예수님과 대화하는 삶, 예수님을 세상에 증거하는 삶, 그리스도인의 품위를 지켜가는 삶이 우리의 고백이 되겠지요.
다음으로 라자로의 모습에서 두 번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라자로는 부활과 생명이라는 곳이 아닌 어두운 무덤에, 그것도 옷이 아닌 천으로 감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라자로에게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걸어 나옵니다. 이 장면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하느님과 교회가 여러분을 부른다는 것이지요. 하느님과 교회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고, 무엇인가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교회의 부르심에 라자로처럼 걸어 나와야 합니다.
라자로는 자신의 몸에서 냄새가 나든, 옷 대신 천으로 몸을 가렸든, 얼굴도 수건으로 가려 얼굴 조자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걸어 나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꼬라지가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도, 제대로 갖추고 입지 않아도, 얼굴을 제대로 들 수조차 없는 죄의 상태나 모양새를 하더라도 걸어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여 걸어 나오는 또 한 명의 라자로가 된다면, 우리는 부활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진실입니다.
이번 주에도 비록 미사는 없지만, 일상의 삶에서 마르타처럼 고백하고, 라자로처럼 용기 있는 우동공동체 되도록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