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리’ 혹은 ‘검역’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quarantine’(콰란틴)입니다. 이 단어는 ‘40일’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quaranta’(콰란타)에서 왔다고 합니다. 옛날 유럽에 흑사병이 돌았을 때, 이탈리아는 그 병이 창궐하는 도시에서 오는 배를 따로 40일 간 격리한 후에 입항하도록 했는데, 거기서 이 말이 유래했다고 합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로 40일 간 광야에 가십니다. 말하자면 40일 간의 ‘자발적 격리’를 하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홀로 단식하시며 예수님은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고, 당신의 사명이 이 악과의 대결이라는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사순시기의 시작과 함께 우리도 뜻하지 않은 사회적 격리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답답하고 힘든 시간이지만, 오히려 이 시간을 은혜로운 피정으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40일처럼 내 안에 있는 악을 대면하고 성찰하며, 그 악과 싸워나갈 힘을 얻는 ‘40일’을 보내시기를 빕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임금에게 ‘만 탈렌트’의 빚을 탕감 받은 이 종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다른 사람을 만나자 멱살을 잡고 모질게 대하며 감옥에 가둡니다. 계산해 보면 이렇습니다.
한 데나리온 : 노동자의 하루 품삯 = 약 5만원 / 백 데나리온 : 5만원 * 100 = 5백만원
한 탈렌트 : 6,000 데나리온 = 약 3억원 / 만 탈렌트 : 3억원 * 10,000 = 3조원 (!)
하느님께 3조원 만큼의 용서를 받은 우리가 5백만원 밖에 안 되는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용서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긴 것이 아니어서 언젠가 용서해야지 하면서 세월을 보내다 보면 용서할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강조하시듯이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때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용서도 할 수 있을 때 용서해야 하고, 자선도 할 수 있을 때 자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이 금세 지나간다고 늘 강조하는데, 우리 인생은 좋은 일을 하며 살기에도 짧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기도지향
코로나 19로 차별받는 이들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