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복음 묵상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0-35

그때에 군중이 예수님께 30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31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34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n aquel tiempo, la gente dijo a Jesús: «¿Qué señal haces para que viéndola creamos en ti? ¿Qué obra realizas? Nuestros padres comieron el maná en el desierto, según está escrito: Pan del cielo les dio a comer». Jesús les respondió: «En verdad, en verdad os digo: No fue Moisés quien os dio el pan del cielo; es mi Padre el que os da el verdadero pan del cielo; porque el pan de Dios es el que baja del cielo y da la vida al mundo». Entonces le dijeron: «Señor, danos siempre de ese pan». Les dijo Jesús: «Yo soy el pan de la vida. El que venga a mí, no tendrá hambre, y el que crea en mí, no tendrá nunca sed».

«Es mi Padre el que os da el verdadero pan del cielo»

Rev. D. Joaquim MESEGUER García 

(Sant Quirze del Vallès, Barcelona, España)

Hoy, en las palabras de Jesús podemos constatar la contraposición y la complementariedad entre el Antiguo y el Nuevo Testamento: el Antiguo es figura del Nuevo y en el Nuevo las promesas hechas por Dios a los padres en el Antiguo llegan a su plenitud. Así, el maná que comieron los israelitas en el desierto no era el auténtico pan del cielo, sino la figura del verdadero pan que Dios, nuestro Padre, nos ha dado en la persona de Jesucristo, a quien ha enviado como Salvador del mundo. Moisés solicitó a Dios, a favor de los israelitas, un alimento material; Jesucristo, en cambio, se da a sí mismo como alimento divino que otorga la vida.

«¿Qué señal haces para que viéndola creamos en ti? ¿Qué obra realizas?» (Jn 6,30), exigen incrédulos e impertinentes los judíos. ¿Les ha parecido poco el signo de la multiplicación de los panes y los peces obrada por Jesús el día anterior? ¿Por qué ayer querían proclamar rey a Jesús y hoy ya no le creen? ¡Qué inconstante es a menudo el corazón humano! Dice san Bernardo de Claraval: «Los impíos andan alrededor, porque naturalmente, quieren dar satisfacción al apetito, y neciamente despreciar el modo de conseguir el fin». Así sucedía con los judíos: sumergidos en una visión materialista, pretendían que alguien les alimentara y solucionara sus problemas, pero no querían creer; eso era todo lo que les interesaba de Jesús. ¿No es ésta la perspectiva de quien desea una religión cómoda, hecha a medida y sin compromiso? 

«Señor, danos siempre de este pan» (Jn 6,34): que estas palabras, pronunciadas por los judíos desde su modo materialista de ver la realidad, sean dichas por mí con la sinceridad que me proporciona la fe; que expresen de verdad un deseo de alimentarme con Jesucristo y de vivir unido a Él para siempre.

♣ 생명의 빵을 찾아 떠나는 행복한 사람 ♣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표징을 보여주신 다음 날, 군중들은 여전히 배를 채울 빵을 찾고 있습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엄청난 사람들이 원한만큼 배불리 먹고도 남는 일을 체험한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 자신들의 욕구를 채울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군중들은 그런 경험에 기초하여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심지어 그분을 임금으로 삼으려고까지 합니다(6,15).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알아보아서가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그분을 추종하고 있는 것입니다(6,26).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빵은 우리의 욕구 충족과 현세적인 만족을 위한 먹을거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빵’이며 바로 당신 자신 전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모세가 준 빵도 실은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것이며 그 빵이야말로 참된 빵이며(6,32),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가르치십니다(6,33). 
오늘 나 역시 군중들처럼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6,30) 하고 묻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우리도 군중들처럼 소유하고, 배고픔과 갈증을 충족시키기 위한 빵을 찾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면 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수록 하느님이 아닌 물질과 세상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 길은 불행과 죽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 참 행복을 바란다면 결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예수님을 믿고(6,35), 그분께 집중해야만 합니다. 생명과 관계를 맺어야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어떻게 ‘생명의 빵’을 나누고 있습니까? 믿는 이들과의 만남에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외모, 명품, 재물에 대한 관심, 다른 이들의 약점을 들추고 험담을 늘어놓으면서 생명의 빵을 나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신앙인들끼리의 만남이나 교회 활동에서 생각으로는 예수님을 중심에 모신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돈과 효율을 따질 때도 적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신앙인들 사이에서조차 돈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면 우리는 배를 채울 빵을 찾는 군중들과 무엇이 다를까 성찰해봅니다. 
또한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드러나고 나누어져야 할 자리를 자신의 지위나 능력, 지식과 경험으로 채운다면 영원한 생명에 얻지 못할 것입니다. 사제, 수도자, 교회 내 지도자들과 봉사자들이 존경받고 대접받는데 익숙해져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 자리가 바로 무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도 참 행복, 영원한 생명을 위해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여 그분과의 생명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현세 욕구 충족과 소유에 목숨을 걸지 않고, 생명의 빵에 맛 들이며 생명을 호흡하는 행복한 날이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어제 복음(6,22-29)에서 예수께서는 군중들에게 
육신만을 배불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찾기'보다는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즉 '추구'하라고 강조하셨다. 
이 말씀은 불멸의 양식이란 썩어 없어질 양식처럼 찾을 수 있는 어떤 무엇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추구(追求)'하라는 것이다. 
'찾는다'는 말은 이미 다 만들어진 것을 뒤지거나 두루 살펴서 발견해 내는 일이다. 
때로는 요구하거나 청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추구한다'는 말은 목적한 바를 이루고자 끝까지 좇아 구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불멸의 양식이란 이미 다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찾을 수 없고 오직 추구될 수 있을 뿐이다. 
불멸의 양식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조건은 
불멸의 양식을 주시고자 하는 자를 믿어야 하는 것이 어제 복음의 결론이었다. 
오늘의 복음에서는 불멸의 양식이 무엇인지가 선포된다. 
오늘 복음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① 예수께서 '불멸의 양식을 추구하는 조건'으로 
'불멸의 양식을 주는 자'를 믿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믿음을 얻기 위한 기적을 요구한다.(30-31절) 
그들은 모세와 예수를 대립시켜 "모세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 
우리의 조상들을 먹이는"(탈출 16,1-36; 시편 78,24; 지혜 16,20-29 참조) 
기적을 보여주었는데, 예수는 어떤 기적을 보여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믿음을 위해 기적을 청하고 있다. 
사실 믿음이란 내심에 주어진 어떤 무엇에 대한 자유로운 응답(response)이다. 
기적을 보고 믿는다면 그것은 기적이 믿음을 강요하는 셈이 되고 만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라. 그들은 항상 기적을 요구했고, 기적을 보고서야 믿었다. 
이것이야말로 기적에 믿음이 강요당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참된 믿음이란 기적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유의지의 온전한 결단으로 성립된다. 
군중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행사하기보다는 기적에 의존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빵의 기적과 비슷한 기적을 요구하고 있으니 
결국 육적 세계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② 이제 예수님의 부연설명이 이어진다.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다 조상들을 먹인 사람은 모세가 아니라 
'예수의 아버지'라고 정정(訂正)하여 사람들의 오해를 풀고자 하신다.(32-33절)
 예수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하느님이시다. 
이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모세가 하늘에 청한 만나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빵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광야생활을 하는 중에 
일용할 양식이 넉넉지 못함을 불평하자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를 양식으로 주신다.(탈출 16,1-36) 
이 기록을 살펴보면 만나는 그야말로 하루의 양식이었고(안식일은 예외) 
다음 날은 곰팡이와 구더기의 밥이었다. 
그러나 오늘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빵은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 그런 빵이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는 것이다. 
③ 사람들이 예수께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늘의 빵'을 청한다. 
이에 예수님 스스로가 '생명의 빵'이심을 선포하신다.(34-35절) 
이 언명(言明)은 더 이상의 설명이 아니다. 
이는 선포요 폭로이며 예수님의 자기계시이다. 
사람들은 앞서간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조상에게 빵을 먹인 사람이 모세가 아니라 '하느님 내 아버지'라는 
예수의 자기계시적 언명(言明)도 쉽게 수긍하는 듯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카파르나움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사람들 보다 순진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안중에 '하늘의 빵' 밖에 없는 것인가? 
예수님 스스로가 '생명의 빵'이라는 선포는 자신에 대한 결정적인 계시이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예수님 스스로가 생명의 허기짐과 타는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예수님이 생명의 빵이시기 때문이다. 
이 빵을 얻기 위해서는 그분에게 가야하며, 
그분에게 가는 것은 그분을 믿는 것이다. 
그분은 빵의 기적을 행하신 그 날 밤,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가 
"나다"(에고 에이미)라고 하신 바로 하느님 그분이시며, 
이분이 바로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고 자신을 구체적으로 폭로하신 하느님이신 것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찬미예수님

성모성지 성당에는 천주교신자만이 아니라

종교가 없는 사람도 궁금해서 누구를 따라올 때도 있고, 개신교 신자도 많이 옵니다.

헌금 낼 때는 종교가 달라도 헷갈리는 것이 없는데

영성체할 때, 세례를 안 받은 분이나 개신교 신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많이 망설이세요.

  

그리고 어떤 분들은 뭔지도 모르고 따라 나오다 보면

앞에 사람이 뭘 받아먹는 걸 보고, 세례는 안 받았지만 손을 내밀어요.

어떤 분은 앞에 사람이 손을 어떻게 내미나~ 자세히 본 다음에 천주교 신자처럼
똑같이 내밀면 성체를 주는 사제는 신자인지 아닌지 알아낼 수가 없지요.

누군가 손을 이상하게 내민다든지 성체를 자기가 집어가려고 해서 깜짝 놀라

“세례 받으셨어요?”

“아니요.’

“지금은 못 드려요..세례 받고 난 다음에 드리는 거예요.”

대개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잘못 나왔구나!’  하고 좋게 들어가세요.

  

그런데 가끔가다가 까칠하게 나오는 분이 계세요.

‘거 보아하니까 몇 푼 되지도 않는 것 같은데, 빵 같지도 않은 것 얇아 빠진 것 지들만 먹고

아니 어디 가든지 손님에게 먼저 베푸는 게 예수님의 사랑인데

처음 온 사람한테 주지도 않고 자기들끼리만 먹고,
에이~ 천주교 쌀쌀맞아서 못 오겠다고.... ’

  

성당에 처음 온 사람이든지, 개신교 신자들이든지, 불교신자들이든지

손 내미는 대로 인심 좀 팍팍 쓰고 싶어요.

그런데 못주는 이유가 뭐예요?

그분들은 성체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 못주는 거예요.

  

오늘 이 앞에 다섯 명 아이들 남자 셋, 여자아이들 둘,

올해는 유난히 적네요. 첫영성체 아이들이 점점 줄어들어요. 특히 시골은.....

작년만 해도 25명을 영성체 시켰는데 올해는 다섯 명 밖에 없어요.

그 개구쟁이었던 아이들이 미사를 하는데

새댁들이 조그마한 아이들 데리고 미사 하러 나오면

엄마 치맛자락 잡고 아이들이 같이 앞으로 나오잖아요.

성체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엄마 잃어버릴까봐 같이 나오는 거죠.

엄마가 손에 성체를 받으면 그 아이들은 너무 너무 궁금한 거야.

‘엄마 나도 좀 줘, 나 좀 줘.’

저기 기둥 두개 지나면서 어떤 엄마가 잘라서 먹입디다. 아유~ 깜짝 놀랐어요.

세상에 자식새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한 것은 알지만

어떻게 성체를 첫영성체도 안한 아이한테 줘요?

철모르는 아이들이 엄마 손에 있는 성체 달라고 난리 칠 때마다 나도 주고 싶어요.

한 열개씩 그냥 한꺼번에.....못주는 이유가 뭐예요?

그 아이들이 성체가 뭔지를 몰라요.

성체를 영하려면 이렇게 3학년이 되면

성체가 뭐고 성체가 우리 교회의 중심이며 예수님의 몸과 피라는 것을 알린 다음

장엄하게 옷을 입혀서 성체를 준단 말이에요.

  

여러분들이 천주교 신자로 살아가면서

주변사람들이나 개신교 신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당할 때

 

성체에 대한 이야기를 예수님이 어디서 하셨느냐?
 

천주교 신자들은 성체를 그렇게 중요시 여기는데 우리 개신교는 없다.

일 년에 몇 번 빵을 사다가 이렇게 나눠먹는 거지

정말 그 안에 예수님의 몸과 피가 들어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

천주교가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성체에 대한 이야기 예수님이 어디서 하셨느냐?

그럼 여러분이 ‘그럼 나랑 같이 성서를 펴서 읽읍시다.’

하고 펼쳐서 읽어야할 성서 구절이 바로 오늘 여러분들이 들은

요한복음 6장 51절에서 58절을 펴면 오늘 나온 이 대목보다 성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강조하신 데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6장 51절에서 58절 외우세요.

물론 요한복음 5장, 6장이 전부다 빵의 기적부터 성체에 대한 이야기지만
오늘 복음이 클라이 맥스예요.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개신교 신자들 중에 성령께 도움을 청하면서

성서를 열심히 읽고 묵상하다보면 항상 오늘 이 대목에서 걸려 넘어진데요.

요한복음 6장 53절에서 58절, 이 일곱 줄 안에 예수님께서 똑같은 말을 여섯 번이나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다.’

‘살과 피를 먹어야만 되고 그 결과는 안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같은 이야기를 이토록 강조하셔서 여섯 번을 계속하신 데는

성서 어디를 찾아봐도 없단 말입니다.

  

어떤 분은 너무나 궁금해서 자기 교회 목사님에게 그 성서를 펴들고 물어본데요.

“목사님, 여기 보면 예수님이 내 살과 내 피를 먹으라고 이렇게 강조하셨는데

왜 우리 교회에서는 주님의 몸과 피를 안 먹습니까?”

 

“에이, 그건 그냥 최후의 만찬 일 년에 한두 번씩 이렇게 재현하면 돼.

진짜 빵 안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들어가?”

속 시원하게 대답을 못해준단 말이에요.

  

그것 때문에 천주교 교리를 나름대로 독학하면서

또 어느 사제가 강론하는 테이프를 듣거나

평화방송을 보면서 천주교로 개종한 신자들이 많아요.

 

어제도 미사 끝나고 어느 형제가 저에게 오더니 제 손을 잡고

‘신부님 저 개신교 신자였는데 신부님 테이프 듣고 특별히 성체에 대한

신부님의 강론을 듣고 개종해서 천주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하고 큰 절을 하셔요.

  

개신교 신자들에게 성체가 뭔지 알릴 수만 있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유언 중에서 최고의 유언

여섯 번을 강조하신 유언 중에 최고의 유언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생을 얻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는 우리 가톨릭의 핵심을 개신교 신자들이 알기만 한다면 
다 천주교로 개종할거예요.

 

성체를 알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그들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개신교 목사들은 성체에 대해서 올바른 답을 할 수 없을 겁니다.

  

개신교 창시자로 불리는 마틴 루터는 알다시피 사제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수도회 사제였는데 하도 똑똑하다보니 순명을 안했죠.

그 마르틴루터가 500년 전에 개신교를 만들었지만 죽을 때 유언이 무엇이었느냐?

‘우리가 천주교에서 가져온 다른 것은 다 없애더라도

칠성사, 그중에서도 특별히 성체성사와 고백성사를 없애면 안 된다.’

  

마르틴 루터도 사제였기 때문에

칠성사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양심으로 믿고 있었어요.

특별히 고백성사와 성체성사를 없애지 마라.

 

그런데 그 후계자들이 칠성사 다 없애고 교파에 따라서 하나, 내지 두개만 남아있죠.

 

개신교에도 세례는 다 주죠?

교파에 따라서 견진까지 남아있는 곳도 있지요.

감리교에서는 견진까지는 줘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성체성사와 고백성사는 다 없애 버린 거예요.

 

엄밀히 따져서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기준을 본다면

개신교도 구원의 문안으로 들어와 있지만

성체성사가 없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보증이 없습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셔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명품에는 반드시 보증서가 따라와요.

우리 천주교 신자들이 늘 자부심을 가져야 될 것은 바로 우리가 명품이다.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명품이라고 하는 것.

천주교신자만이 성체를 영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게 보증서입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예수님을 찾고,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구원의 문 안에는 들어왔으나

그 예수님이 하신 유언을 안 지키고 살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없어요,

 

내 살과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요,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성체는 천상의 약입니다.

인삼 녹용을 먹어도 100년을 못 살지만

성체를 영하는 자는 영원을 보증 받습니다.

  

신부님들 가운데는 흔하지는 않지만 폐병환자의 그 각혈 속에 묻어 있는

성체때문에 통째로그 핏덩어리를 들여마셔야 할 때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봉성체 한 직후에 폐병환자가 각혈한 성체를 들여마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 폐는 어느 장기보다도 건강합니다.

그곳에 성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도소에서 천주교신자 사형수들이 그 밧줄 앞에서도 위대하게

죽을 수 있는 힘도 바로 매달 영하는 성체때문입니다.

  

성체성사를 신비의 성사라고 합니다.

 

기적은 전과 후가 증명이 되지만 신비는 전후에 외적인 변화가 없습니다.

여전히 빵의 모양입니다.

축성을 하기 전에도 빵의 모양이고 축성을 한 후에도 빵의 모습이지요.

이건 신비입니다.

  

성지에 오기 전에는 다리가 짧았는데 순례를 한 후에는 길어졌다면

그건 기적이지요. 전과 후가 증명이 되니까~

성지에 올 때는 온 몸이 암덩어리였는데 성지순례하고 나서

암이 없어졌다면 이것은 기적입니다.

  

기적은 신앙이 없는 사람도 증명하는 거지만

신비는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야 믿을 수 있는 거지요.

 

그래서 신비는 기적보다도 훨씬 위에 있는 단계이지요.

영성체 하기 전에 우리는 ‘신앙의 신비여!’

이것은 믿음으로 주님의 성체를 준비하여라!

그 뜻이겠지요.

 

가톨릭의 중심에는 성체성사가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했을 때 누가 감히 그것을 의심했겠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첫 번째 기적,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항아리에 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그 분의 능력이

포도주를 피로 변화시키지 못하겠는가!

  

스의스의 파베르니 수도원에서 1608년 5월 24일 성령강림대축일 날

성광에다가 성체를 모시고 제대 위의 성광에 성체를 현시했는데

제대의 촛불이 넘어지면서 제단에 불이 붙었습니다.

제대가 불길에 휩싸였을 때 한가운데 예수님을 모시고 있던 그 성광이 놀랍게도

공중으로 불길을 피해서 떠올랐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33시간 동안 제대 위 공중에 떠 있었다고 하며

그것을 보기 위해서 왔던 사람들이 만 명 정도에 이른다고 합니다.

천주교신자들을 인정사정 없이 끌어들이고 개종시키던 그 시절이었습니다.

이들은 성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부정했습니다.

칼빈파도 그렇고 루터파도 그렇고 ...

이 기적은 스위스와 프랑스에 어마어마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결과 배교했던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다시 천주교로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체를 의심했던 자 , 부정했던 자들이 파베르니수도원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두둥실 떠 있는 성광 밑부분에 투명한 받침대가 있는 줄 알고

줄을 질러보고, 손도 넣어보았지만, 성광은 2m 이상 높이 떠 있었고

그 밑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진짜임이 확인이 되었습니다.

  

어느 사제가 불에 탄 그 제대 위에 하얀 성체포를 다시 새로 깔자

  

수천명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목격한 바가 진실임을

직접 서명한 것, 눈으로 확인한 것이 수도원 수장고에 수 천장이 보관이 되어 있습니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근본적인 차이는 성체입니다.

또 성모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의 지상에서의 목적은 예수님을 닮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 가톨릭신자들은 지상에서의 삶의 목적은

성체를 영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입니다.

 

닮는 것과 직접 예수님이 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성체를 영하는 천주교 신자들은

그리스도처럼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되어서 봉사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처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되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과의 동일화입니다.

 

개신교신자들은 꿈도 꾸어보지 못할 축복을

미사 때마다 이 죗덩어리의 몸 안에 거룩한 성체로 오십니다.

 

우리 교우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치유되는 때는 성체를 영한 직후입니다.

 

피정 끝에 회개와 기쁨으로 파견 미사 때 성체를 영한 신자들이 많은 치유를 받는 것을 봅니다.

영성체 후에 성가 부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조용히 자리로 들어가서 스스로 치유기도를 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손으로 변했기 때문에 믿으시고

영의 상처가 많은 사람들은 가슴에 손을 대고

육신이 아픈 사람들은 예수님의 손을 대면서 치유기도 하십시오.

  

성체를 영하면 우리는 또 하나의 성모마리아가 된다고 합니다.

성모님이 열달 동안 예수님을 태중에 모셨듯이

성체를 영할 때마다 우리는 또 하나의 성모마리아가 되는 겁니다.

 

성체를 영하는 자는 움직이는 감실이 되고 걸어 다니는 감실이 됩니다.

 

감실은 제대 뒤의 붙박이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체를 영한 우리 자신이 바로 예수님을 모시고 다니는 감실이 됩니다.

 

거룩한 감실의 입에서 욕이 나오겠습니까?

거룩한 감실의 입에서 어떻게 저주가 나오고, 원망이 나오고,

분노가 나오고 슬픔이 나올 수 있겠는가!

  

오늘 주님께서는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그 분기점이 된다고 했습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셔라!

한 번도 아니고 여섯 번이나 유언하셨습니다.

  

지난 주일 강론 때도 그랬지만 마귀가

우리 신자들을 성체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각 본당마다 꽤 많은 교우들이 주일미사는 참례하는데

성체를 영하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만 있습니다.

그 이유는 뭐겠습니까?

고백성사 보기 싫어서입니다.

성사 볼 기회가 안 되고 아직 준비가 안 되어서 어쩌다 한두달 정도

성체를 못 영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아주 습관적으로

사탄의 악습에 빠져서 1년 ~2년 몇 년 씩을 주일미사 참례하면서 성사를 안 봅니다.

마귀가 노리는 것은 성사를 못 보게 해야만

주님의 성체를 못 영하게 하기 때문이지요.

  

주님의 성체를 못 영하는 자는 천상의 약을 못 먹기 때문에

힘이 없어서 유혹에 쉽게 빠집니다.

죄에 자주 떨어집니다.

 

고백성사를 못 보게 하는 것은 결국은 우리를 죄에 떨어지게...

성체와 멀어지게 하는 것을 늘 명심하면서

 

아무리 진홍색처럼 붉은 죄라 하더라도 겸손되이

사제 옆에 계신 예수님께 고백할 때는

눈처럼 희게하여 거룩한 성체를 영할 수 있는

준비를 시켜 준다고 하는 것, 명심하십시오.

 

우리 천주교신자들은 영적인 명품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특별히 선택받아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

여러 가지 영적인 보증으로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명심하면서

주님의 성체, 겸손한 마음 기쁜 마음으로 영하도록 합시다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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