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세례자 요한의 죽음의 이야기가 복음을 채웁니다. 요한의 가치는 세상에 유일무이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누구도 그처럼 하느님께 충실하고 대단하게 살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이증언하신 대로 세상에 태어난 이 중에 그와 같은 이는 없었고 그처럼 거룩하고 완벽할 정도로 훌륭한 하느님의 사람은 없었습니다.
요한을 생각하면 사람들이 말하는 완전한 신앙인의 표상이자 성직자의 모범으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어떤 의미에서 머리 속에 그리는 것은 요한을 따르는 중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힘듭니다. 사제로 살면서 지금까지 요구되는 덕목들을 보면 기도에 정진하고 고행과 극기에 익숙한 겸손한 사제를 말합니다. 태산같은 권위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전하여 사람들을 모두 고개 숙이게 하거나 겸손하게 할 만큼 훌륭한 삶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광야에서 살며 하느님이 주신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자연에서 삶을 영위하며 고행과 극기를 밥먹듯이 하는 사람, 단식이 그의 가장 대표적인 고행이며 기도하는 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스승이 요한이었습니다. 사회의 지배자도 어쩌지 못하는 권위를 지니고 불의에 굽히지 않는 정의로운 사람이 요한이었습니다. 그가 요르단 강에 섰을 때 모든 이는 그의 말과 삶 앞에서 고개를 숙였고 물 속에 들어와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메시아가 아니라 말하며 메시아 앞에서 종의 처지 조차 사양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수도자로서, 또 성직자로서도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이가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우리는 '순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보면서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는 결국 모범이 되고 모델이 되었으나 현실에서 그처럼 살아가는 누구도 남기질 못했습니다. 또 그의 죽음은 여느 사람의 죽음과달랐습니다. 엄밀히 그는 신앙 때문에 죽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권력자의 자존심에 희생된 것이어서 그의 죽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는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히려 그가 아직도 유일무이한 존재, 아무도 그를 따를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에 더 생각이 깊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눈길 속에 죽었으나 그는 지하감옥에서 감추어진 죽음을 맞이하면서 비밀과 신비 어디쯤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를 본 모든 사람이 그의 부활로 인해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알게 하였고 그분처럼 살아야 할 선택을 가능하게 했지만 요한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한 사람의 가치만 남겼습니다.
우리가 아직 요한을 그리워하고 그의 가치를 그리스도와 혼동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는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대가입니다. 반면 그리스도는 누구나 따라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을 이유 때문에 망설이는 사람으로 우리 안에 남으셨습니다. 곧 헤로데는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으로 착각하지만 요한은 되살아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죽지 않고 살아서 끊임 없이 세상을 구하는 분은 결국 사람들 속에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한 위인의 죽음의 이야기에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가치를 발견하는 시간입니다. 그리스도 오늘도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그분의 뒤를 따르는 평범한 신앙인임을 기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