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박해 : 신해박해,을묘사옥,신유박해,기해박해,병오박해,
 김대건순교,경신박해,병인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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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인박해 기간중 1866년 병인양요와 1868년 덕산 사건으로 가장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사진은 탁희성 화백이 그린 절두산 순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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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선대원군은 1871년 신미양요 이후 서울 종로와 조선 8도에 척화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한 때에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게 되니,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우리 만년 자손은 경계하라’고 적혀 있다. 사진은 절두산성지에 있는 척화비.

(1) 신해박해(1791(정조15),辛亥迫害,신해사옥,진산사건,신해진산사건)

 신해박해”(辛亥迫害)란 1791(정조15)에 발생한 조선 최초의 로마 카톨릭교회에 대한 박해사건으로 신해교난”(辛亥敎難), “신해사옥”(辛亥邪獄), “진산사건”(珍山事件), “신해진산사건”(辛亥珍山事件)이라고도 합니다. 1784년 조선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천주교는 경기와 내포(內浦)지방전주를 중심으로 전파되었습니다. 1790청나라 북경교구 북경 교구장인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주교는 북경을 방문한 윤유일을 통하여 전달한 회신서에서 조선 천주교에 대한 제사금지령을 선포하였습니다. 1791년 여름전라도 진산군(,충남금산)의 윤지충 바오로와 그의 외종사촌 권상연 야고보는 윤지충의 모친상 때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태워 버렸습니다특히 어머니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유교식 장례를 거부하고 조문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 예식으로 장례를 집례하여 종친들의 분노를 샀습니다윤지충과 권상연이 사대부 양반 가문으로서 행한 이 사건이 조정에 전해지면서 당쟁으로 비화 되기에 이르렀습니다천주교를 공격하는 공서파”(攻西派)의 홍낙안은 천주교를 옹호하는 신서파”(信西派)를 맹렬히 비난하며 폐제분주(廢祭焚主: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움)는 전통적 유교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패륜이며 무부무군(無父無君:부모도 임금도 무시하여 행동이 막됨)의 불효불충이라고 정조의 결단을 촉구하였습니다이에 진산군수 신사원이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여 천주교 신앙으로부터 배교할 것을 회유하였으나 실패하고 전라 감영으로 이송되어 전라감사 정민시로부터 재 심문을 받았으나 천주교 신앙을 굽히지 않았습니다더 나아가 양반 신분을 박탈당하고 다시 회복되지 않는다 해도 신앙을 버리지 않겠다는 굳건한 신념을 나타내었습니다결국 사회도덕을 문란케 하고 무부무군의 사상을 신봉하며 난행하였다는 죄명으로 1791년 128일 전주 남문 밖현재의 전동성당 터에서 차례로 참수형을 당하고 순교하였습니다신해박해의 참사로 청나라 천주교회는 선교사 파견을 보류하였습니다.

 

조선 천주교회는 외부로 부터 전도의 사명을 부여 받고 한반도내의 위험구역에 들어와 활동하는 공식적인 선교사없이 전통적 사대부 양반계층인 유교지식인들에 의해 설립된 교회였습니다서학이라는 학문적 탐구로 시작된 연구가 신앙으로 발전한 사람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창립된 매우 이례적인 사례가 되었습니다신해박해로 인하여 천주교 신앙인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의 한계를 인식하였습니다유교와 천주교가 조상제사문제를 이유로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확인한 것입니다이로서 천주교 내부에서도 갈등이 발생하였으며 유교적 전통적 가치체계로 후퇴 또는 타협하거나 그 한계성을 극복하고 천주교적 가치체계를 숭앙해야 하는 두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것입니다중요한 것은 신해박해를 계기로 문화적 종교신앙에서 순수한 천주신앙으로의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였습니다.

 

(2) 을묘사옥(1794,乙卯邪獄,을묘박해)

 

을묘사옥”(乙卯邪獄)은 을묘박해”(乙卯迫害)라고도 부르며 1795(을묘년청나라 선교사 주문모” 신부에 대한 체포미수에 그친 을묘실포사건(乙卯失捕事件)을 계기로 발생한 천주교 박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1784년에 설립된 조선 천주교회는 북경교회 남천주당 그라몽”(Jean de Grammont, 梁棟材신부로 부터 베드로라는 영세명과 영세를 받은 이승훈”(李承薰,1756~1801,영조32~순조1)을 주도로 성직자가 없는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의 독학을 통하여 천주교 신앙을 가지게 된 무목자 교회(無牧者敎會)였습니다이승훈과 이벽정약종 등은 신앙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방안과 교회조직에 대한 이해가 한계점에 도달하자 성직자의 필요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일시적으로 자체적인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조직하였으나 북경교회로부터 부정적인 답변을 받았습니다이로 인하여 1791(정조18), 신해박해 이후 북경주교에서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는 청빙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그 결과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10개월에 걸쳐서 한양으로 입국하게 되었습니다그러나 1795년 627배교자 한영익의 밀고로 주문모 신부의 존재가 노출되었고형조에서 최인길의 자택을 기습 습격하였으나 사전에 피신한 후 였습니다의금부에서는 주문모 신부를 북경에서 인도한 지황과 윤유일을 긴급 체포하고 이들을 추궁하였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아 참수 함으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최인길과 지황과 윤유일이 순교한 지 2개월 후대사헌 권유가 두사람을 너무 쉽게 죽였다고 이 문제를 재론하여 부사과 박장설이 이승훈이가환정약용등을 체포하여 이승훈은 충남 예산으로 유배하고이가환은 충주목사로정약용(승지영감)은 금정찰방“(金井察訪,7)으로 수직하강 좌천 하였습니다.

 

(3) 신유박해(1801(순조1),辛酉迫害,신유사옥,천주교4대박해)

 

신유박해”(辛酉迫害)는 1801(순조1신유년 시파와 벽파의 당쟁정치 구도에서 벽파가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시파를 제거하는 일련의 대대적인 숙청사건이었습니다신해박해(1791(정조15))이후 천주교에 대한 유화정책을 펼치던 정조가 1800년 818일 승하하였습니다이어 어린 나이의 순조”(11)가 왕위에 즉위하면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55)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였습니다이에 벽파(공서파)가 정순왕후와 손을 잡고 정권을 장악해 가면서 천구교 탄압을 명분으로 남인시파(신서파)에 대한 숙청을 시작하였습니다. 1801년 222정순왕후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멸륜지교(滅倫之敎)”라는 천주교 엄금에 관한 하교를 지시하였습니다정순왕후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적용하여 다섯집 가운데 한 집에서 천주교 신자가 적발되면 모두 처벌하는 매우 가혹한 연좌제를 실시하였습니다이 사건으로 청나라 천주교 신부인 주문모가 끝내 순교하였고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과 정약종”, 천주교 여성사에 빛나는 강완숙이 참수형을 당하였습니다신유박해로 인하여 1년동안 300여명의 천주교 신자가 순교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1801년 317은언군(정조의 이복동생,왕족)의 부인 송씨와 자부 신씨가 사약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며, 48일에는 이승훈정약종최필공최창현홍교만홍낙민이 서소문 형장에서 순교하였습니다이어 531, “주문모” 신부가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였고 순례자들이 시체마져 찾을 수 없도록 암매장하여 버렸습니다. 61일에는 김건순이 서소문밖에서 순교하였고, 613일에는 은언군이 강화도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습니다. 72일에는 강완숙과 궁녀들이 서소문에서 참수당하고, 104주문모 신부의 미사 집전을 돕는 최초의 복사였던 홍필주”(필빕보)가 서소문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그 외에 공주 내포교회(內浦敎會)의 사도로 불리워진 이존창과 전주교회 지도자인 유항검과 관검” 형제도 전주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신유박해를 피해 겨우 생존한 신도들은 경기도의 야산 지대와 강원,충청 산간지방태백산맥과 소백산맥 깊은 계곡으로 은둔하며 천주교 신앙을 지켜야 했습니다그러나 이것은 자신들의 안위만을 생각한 비겁함이 아니라 천주교 신앙의 재확산을 촉진하는 기폭제로 사용하였습니다이것을 계기로 양반사회 중심의 천주교회가 서민사회로 뿌리를 내리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4) 기해박해(1839(헌종5),己亥迫害,기해사옥,천주교4대박해)

 

기해박해”(己亥迫害)는 기해사옥”(己亥邪獄)이라고도 불리우며 1839(헌종5) 3벽파의 풍양 조씨 일가가 시파인 안동 김씨를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에 의해 시작되어 그 해 10월까지 천주교를 박해하였습니다.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즉위한 헌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한 순원왕후가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이 사학을 엄히 처단하도록 명령을 내려달라는 사학토치령 상소를 받아들여 시작된 피비린내 나는 박해는 10개월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신유박해”(1801)로 천주교가 은둔자의 위치에 있었으나 정순왕후가 승하하고 안동김씨 이자 국구(國舅)인 김조순이 권력의 실세로 등장한 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유화정책으로 돌아섰습니다그 때를 기하여 로마교황청 그레고리오 16는 1831년 99일 천주교 조선대목구를 설정하여 독립교구가 조선에 최초로 탄생하였습니다. 1836년 서양인 천주교 신부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소속 피에르 모방과 자크 샤스탕이 입국 하였으며 이듬해인 1837년에는 주교 로랑마리조제프 앵베르가 입국하여 조선 천주교는 새로운 영적 지도자의 교육훈련과 지도 아래 성장을 향하여 갔습니다.

 

1832년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한 김조순이 사망하고순원왕후의 수렴청정 초기에는 친오빠인 김유근”(金逌根)이 정치를 보좌하였습니다김유근은 유진길”(劉進吉)의 권유로 1839년 5월 세례를 받는 등 천주교 신앙은 일부 자유를 구가하였으나 김유근이 정계를 은퇴하고 벽파인 우의정 이지연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사태는 급변하였습니다천주교인에 대한 은밀한 사찰과 경고는 이미 1838년부터 이루어 지고 있었습니다형조판서 조병현”(趙秉鉉)은 배교를 권유하고 살생을 기피하였습니다그러나 1839년 3월 우의정이 순원왕후에게 사학토치령과 함께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승인받아 천주교 발본색원 작업에 나섰습니다형조로 이송된 43명의 천주교인 가운데 31명은 배교를 선언하고 석방되었으나 남명혁박희순등 9명은 순교를 선택하였습니다그후 천주교 온건파인 김유근이 사망하고김순성의 배교로 정3품 당상역관 유진길을 비롯하여 정하상조신철” 등 조선교회재건운동의 핵심인사들이 체포되었습니다.

 

422수원으로 피신하였던 앵베르 주교는 자신으로 인하여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겪게 되자 73일 의금부로 자수하여 투옥되었습니다그후 모방과 샤스탕 신부에게도 교인들의 재난이 극심하다는 판단하에 자수를 권유하였고 729일 충청도 홍주에서 자수하여 한양으로 압송되었습니다순정왕후는 구체적인 진상규명을 생략한채 신유년 주문모 신부의 전례를 들어 군문(軍門)가에서 효수경중”(梟首警衆)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효수경중은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모든 사람에게 경계의 본을 보여주는 극형으로 외국인에 대한 처벌중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선고였습니다이로서 앵베르 주교와 모방과 샤스탕 신부는 87군문효수의 극형으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다음날인 88이와 관련한 정하상유진길에게도 모반부도죄”(謀叛不道罪)로 참수형을 당하여 함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814일에는 조신철이 참형선고를 받고 순교함으로서 천주교인에 대한 처벌과 절차는 매우 급속한 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그 이전인 610일에는 이광렬과 여신도 7명이 서소문밖에서 순교하였으며, 726일에는 박후재와 여신도 5명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이지연이 퇴임하고 조인영이 우의정으로 등극한 후에는 천주교 박해가 한 층 더 강화되었습니다조인영은 천주교인에 대한 참형절차를 불법적으로 간소화 시키고 옥중교인들을 비밀리에 교수하여 처리하는 등 천주교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처벌을 자행하였습니다이로서 많은 사람들이 절차와 심문없이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며 박종원이문우” 등 10명의 천주교 열성파들을 1227일과 28일에 각각 참형하였습니다가해박해는 전국적 규모로 방대하게 이루어졌고 천주교인 모두를 추적함으로서 투옥되지 않은 사람들까지 가산과 전답을 버리고 피신을 거듭해야 하는 위기가 계속되었습니다특히 한양과 경기지역의 천주교인들은 거의 대부분 체포되었을 정도로 극심한 핍박을 가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배교자들도 속출하였습니다가해박해는 가장 혹독한 방법을 동원한 천주교 대학살이었습니다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세력의 틈바구니속에서 철저하게 희생양이 된 천주교인에 대한 정치적 보복행위는 그 후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5) 병오박해(1846(헌종12),丙午迫害,병오사옥(丙午邪獄),천주교4대박해)

 

병오박해”(丙午迫害), 즉 병오사옥”(丙午邪獄)은 신유박해”(1801(순조1),辛酉迫害,신유사옥), “기해박해”(1839(헌종5),己亥迫害,기해사옥), “병인박해”(1866(고종3),丙寅迫害),병인사옥)와 함께 천주교 4대박해로 1846(헌종12조선 최초의 사제인 동시에 조선교구 부교구장인 김대건”(金大建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발생한 천주교 박해입니다.

 

1846년 조선에 입국한 천주교 조선교구의 3대 교구장 페레올”(Ferreol,J.J.) 주교는 조선인 최초의 김대건” 신부와 함께 만주에서 입국절차를 기다리는 메스트르”(Maistre) 신부와 최양업을 입국시킬 방도를 찾고 있었습니다. 1836년 1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피에르 모방 신부가 입국하고, 4월에는 로랑마리조제프 앵베르 주교가 입국하였으며뒤를이어 12월에는 자크 샤스탕 신부가 각각 입국하였습니다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선교지역의 신도들에게 신학교육을 하여 성직자를 양성하는 현지화 전통에 따라 김대건최양업최방제를 마카오 신학교에 유학을 보내 공부하도록 하였습니다. 1845상하이 김가항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아 조선 천주교 최초의 사제가 된 김대건 신부는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1846만주 메스트르신부의 입국을 위해 서해안로를 탐색하였습니다서해안 순위도에서 관장과 사소한 시비에 휘말려 자신의 신분이 공개되어 현장에서 긴급 체포되었습니다등산진과 옹진을 거쳐 해주감영으로 호송된 김대건 신부가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그의 신분이 밝혀짐에 따라 해주 감사는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한양으로 압송하였습니다평범한 범법자에서 시국사범으로 형량이 높아진 김대건 신부는 천주교 신앙의 정당성과 탄압 중지그리고 세계정세에 관한 조선조정의 각성을 촉구하였습니다한편서해안에 대한 대대적인 추적 작업에 들어간 조정은 김대건과 함께 서해안으로 동행하였던 선주 임성룡과 뱃사공 엄수와 선주의 부친인 임치백과 현석문“, ”한이형“ 등 천주교 신자 10여명을 체포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 본국에 구조를 요청하였습니다프랑스 해군 동양함대 사령관 장바티스트 세실” 제독이 군함 3척을 이끌고 홍주해역에 나타나 1839(헌종5프랑스 선교사 학살책임과 함께 통교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갑작스런 강대국의 등장에 조선 조정은 매우 당황하였고천주교 사태를 조기에 끝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그래서 916일 새남터에서 김대건 신부를 국가에 대한 반역과 사교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처형하였으며 현석문임치백한이형남경문우술림김임이정철염” 등 8인의 천주교인들은 920일 처형하였습니다이 사건은 조선 천주교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서품을 받은 지 1년만에 일어난 초유의 사태로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는 첫 번째 사건이 되었습니다.

 

➀ 김대건 신부(1821(순조21)~1846(헌종14), 안드레아병오박해 순교)

 

김진후”(金震厚)는 천주교인으로서 10년 동안의 오랜 옥고를 이기지 못하고 순교하였습니다그의 아들 김택현”(金澤鉉)은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삶의 터전을 이어 갔습니다김택현의 아들 김제준”(金濟俊)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습니다그는 할아버지의 영적 유산을 이어가며 1839년 기해박해때 서울 서소문밖에서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그리고 김제준의 아들 김대건”(金大建)도 아버지의 영적 유산을 이어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김대건은 1821(순조21) 821충청도 면천군 범서면 솔뫼마을(,충남당진 우강면)에서 출생하였습니다천주교 탄압정책과 박해를 피해 천주교인 가족들은 모두 흩어져 고아처럼 살아야 했습니다김대건이 7세때박해를 피해 천주교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경기도 용인 미리내 마을(,경기도 안성)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부친인 김제준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앙을 가진 김대건은 1836년 청소년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기 위해 마을을 방문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피에르 모방” 신부에게 발탁되어 한양에서 라틴어 등 신학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한양에서 기초신학공부를 마친 김대건(안드레아)과 평신도 신학자 정하상”(바오로)과 이광렬”(요한)은 청나라로 귀국하는 유방제”(피치피코신부의 주선으로 1836년 12, “최양업”(토마스)과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조선을 출국하였으며 만주와 요동을 경유하여 1837년 67마카오에 도착하였습니다마카오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의 프랑스 카톨릭 선교사들과 르그레즈와” 신부(교수)는 신학철학지리역사라틴어프랑스어를 가르치며 조선 신학생들의 신심과 면학과 겸손과 존경에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마카오는 포르투갈령으로 청나라로부터 이양된 곳이었습니다포르투갈 자치정부와 프랑스 카톨릭 선교사들의 불협화음으로 1839년 4김대건은 필리핀 마닐라로 피신하여 롤롬보이 성 도미니크수도회 수도원에서 학습을 계속하였고일시 귀국한 마카오에서 1842민중반란을 피해 다시 청나라로 가서 신학공부를 졸업 하였습니다. 1844년 12김대건은 카톨릭 부제” 서품을 받았으며, 1845년 817상하이의 금가항”(金家港)성당에서 천주교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서품성사 집전으로 카톨릭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당시 사제 서품 축하객을 위해 김대건은 라파엘 호” 선박을 구입하여 1845년 430천주교 신자 12명과 함께 제물포항(인천)을 출발하여 침몰위기를 극복하며 상하이 항에 도착하였습니다최초의 조선 신부를 목격한 이들은 감격을 잊지 못하였고 김대건 신부도 이들의 축하속에 새로운 각오를 다졌습니다. 1845년 824사제 서품 7일후 주일 상하이 횡당” 성당(횡당신학교)에서 다블뤼”(Daveluy) 신부의 복사를 받으며 첫 미사를 드렸습니다. 831일 상하이항을 떠난 라파엘 호는 서해안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928일 제주도 용수리에서 선박수리를 한 후 1012금강 하류 나바위에 도착하였습니다. 1845년 10월에 사제로서 첫발을 내 디딘 김대건 신부는 그해 12월까지 한양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사목을 하였으며 남편을 순교자로 잃은 어머니를 위로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에게 주어진 첫 번째 과제는 외국선교사의 입국과 주청 선교부와의 연락과 교신에 필요한 항로개척이었습니다김대건 신부는 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경기도 연평도 해안에서 메스트르”(Maistre) 선교사가 입국 가능한 항로를 찾았습니다. 1846년 65선교사 항로지도를 중국인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연평도 관헌들과 시비가 일어나 그 자리에서 신분이 노출되었습니다이로서 긴급 체포된 김대건은 옹진을 거쳐 해주감영으로 이송되었습니다해주감영에서 심문을 하던 중 김대건이 신부라는 것을 알게 된 해주감영은 지역적 차원이 아닌 국가조정에서 해결할 중대 사안이라고 판단하여 한양으로 긴급 압송하였습니다김대건은 옥중에서 세계 지리책과 영국에서 제작한 세계지도를 번역하여 헌종왕에게 바치는 등 일부 온건파들의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영의정 권돈인의 대역죄인 처벌 주장으로 결국 참수형을 선고 받았습니다당시 조선조정은 천주교 신부를 절대적인 영적 지도자로 보았고 이들을 수수방관할 경우 조상 대대로 이어 내려온 유교와 제사문제의 근간이 흔들린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특히 천주교 신앙이 평등주의와 남녀간의 차별을 금지하는 등 조선의 관습과 법제와도 충돌하는 경향이 있어서 배타적인 입장은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천주교 신앙이 국법을 위배하지 않았고왕조에 대한 반역이나 역모가 아니며세계정세의 변화에 대한 조선 조정의 대각성과 함께 모든 천주교 신자를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그러나 김대건 신부와 관련한 서해안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작전이 전개되면서 임성룡(선주)과 엄수(뱃사공)와 임치백과 현석문한이형” 등 천주교 핵심인물 10여명이 체포되었습니다김대건 신부는 타협점이 있지 않았습니다그이 신앙은 누구보다도 확고하였고 그와 함께하였던 동역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그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고 잔인한 고문과 압제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았습니다.

 

때를 맞추어 프랑스 해군 동양함대 사령관 세실” 제독이 군함 3척을 동원하여 홍주해역에 정박하였습니다. 1839(헌종5프랑스 선교사 앵베르 주교와 모방과 샤스탕 신부에 대한 학살 책임을 물어 현재 수감중인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하였습니다유럽 강대국의 직접적인 군사대응으로 위기에 봉착한 조선 조정은 조선 천주교 사태를 조기에 매듭짓기 위한 극악한 행위를 서둘러 집행하였습니다.

 

1846년 916새남터(한강변 모래사장)에서 김대건 신부는 국가에 대한 반역과 사교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순교자의 길을 갔습니다나흘 후인 920일에는 현석문임치백한이형남경문우술림김임이정철염” 등 8인의 천주교인이 김대건 신부를 이어 순교자가 되었습니다이 사건은 조선 천주교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서품을 받은 지 1년만에 일어난 충격적인 사태로 로마 교황청과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가 문제를 제기한 국제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목이 잘려 나간채 군문에 걸려 효수되었습니다김대건의 시체는 찾을 수 없도록 가매장되어 있었으나 천주교 신자인 이민식이 시신을 찾아내어 미리내 성지(경기도 안성)로 이전하였습니다. 1857교황 비오 9가 김대건 신부를 가경자”(존엄한 자)로 선포하였고, 1960년 75교황 비오 11가 복자”(복있는 사람)로 선포하였으며, 1984년 56교황 요한 바오로 2는 성인으로 시성하였습니다.

 

(6) 경신박해(1860(철종10),庚申迫害,경신교난,경신사옥)

 

경신박해”(庚申迫害)는 경신사옥”(庚申邪獄), “경신교난”(庚申敎難)이라고도 하며 1860(철종10)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사건 이었습니다이것은 조선 조정차원이 아니라 한 개인의 사적인 탐욕으로 시작된 과욕된 충성심이 문제였습니다. 1839(헌종4기해사옥 당시 천주교 박해에 앞장섰던 금위대장 임성고”(任聖皐)의 아들인 좌포도장 임태영”(任泰瑛)이 천주교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으로 우포도장 신명순”(申命淳)과 함께 거행한 폭력적 박해였습니다.

 

조선 25대왕 철종은 문벌정치에 희생된 비운의 왕으로 알려져 있으며비교적 온건 온화한 성품으로 과격한 충돌을 거부하였습니다당시 집권세력인 안동 김씨도 천주교에 대하여 타협적이고 관대한 정책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천주교는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습니다이러한 상황속에서 평소 천주교에 대하여 앙심을 품고 있던 임태영은 신명순과 뜻을 함께 하여 조정의 허락없이 개별적으로 군령을 동원하였습니다이들은 서울과 지방의 천주교인 부락을 급습, 30여명의 신자들을 무작위로 체포하였습니다포졸들이 천주교인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재산의 약탈과 방화 등 불미스러운 만행을 일삼아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발생하였고민심이반을 통하여 조정에 까지 이 사실이 알려졌습니다훈련대장 겸 호조판서인 김병기”(金炳冀)와 병조판서 김병운”(金炳雲)은 수십년간 천주교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로 민심이 흉흉하고 나라가 어지러운데 또 다시 천주교인들을 막무가내식으로 체포한 것에 대하여 역으로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천주교도들에 대한 처벌로 상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던 임태영과 신명순은 오히려 이 일로 파면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또한 더 이상의 천주교인 체포는 금지되었고, 87일 이미 투옥된 교인들이 철종의 명에 의해 모두 석방됨으로서 9개월간에 걸친 옥사가 종결되었습니다. “최양업”(崔良業신부가 경상도 죽림에서 일시 체포 구금상태에 있었으나 석방되었고프랑스 선교사들도 발빠르게 피신하여 더 이상의 박해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7) 병인박해(1866(고종3),丙寅迫害,병인사옥,천주교4대박해)

 

병인박해”(丙寅迫害)는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도 부르며, 1866(고종3조선말기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8천여명의 천주교인을 처형한 대규모 탄압을 말하는 것입니다병인박해는 1866년 봄과 여름가을과 무진사옥”(戊辰邪獄)의 1868년과 신미사옥”(辛未邪獄)의 1871년까지 4차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조선천주교는 상류층 양반사회를 중심으로 시작된 특별한 복음의 출발점이 있었습니다그것은 서학에 관심을 가졌던 양반사회가 천주교를 학문적으로 탐구하던 기반에서 기인하였으며 이것이 자생적인 종교집단으로 발전한 것이었습니다최초의 영세자 이승훈(1801)과 최초의 신부 김대건의 순교(1846)위에 조선 천주교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순교자가 늘어날수록 확장되어가는 경향을 갖고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하여 우호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서학과 천주교를 통하여 프랑스와 서구 열강들과 친교를 생각하였고부인 여흥부 대부인 민씨는 천주교 신자였습니다천주교 활동을 강화하는 프랑스를 통하여 재정 러시아제국의 남하정책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흥선대원군에게는 있었습니다그러나 영국과 프랑스군이 청나라의 베이징을 점령한 사건으로 청나라에서는 천주교를 본격적으로 탄압하였습니다이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강화하며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시도하였습니다.

 

1858년 6, “애로우호사건(Arow號事件)으로 톈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되고 러시아가 연해주 지방을 차지하면서 조선과 러시아는 두만경을 국경으로 인접하게 되었습니다러시아는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고 흥선대원군과 정부 고관들은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었습니다이 시기를 이용해 김면호(金勉浩), 홍봉주(洪鳳周)” 등 천주교인들이 이이제이(以夷制夷)식 방아책(防俄策)을 건의하여 천주교의 확장성과 러시아 견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대책으로 삼으려 하였습니다(승지 남종삼”(南鍾三)은 흥선대원군에게 조불조약을 체결하여 나폴레옹 3세와 손을 잡고 러시아의 남하정책 견제를 주장하며 이를 위해 조선교구 주교 베르뇌”(Berneux, 張敬一)와 접촉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흥선대원군은 남종삼의 제안이 성공하면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승인하겠다고 하였으나 당시 베르뇌와 주교 다블뤼”(Daveluy, 安敦伊)가 지방 순회중인 관계로 1개월이 지체되었고 그들 또한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외교적 성과는 없었을 것이었습니다

 

1개월의 짧은 기간동안 상황은 급반전되었습니다. 1866년 1북경사신은 영국과 프랑스군이 베이징을 점령한 사건으로 청나라에서는 본격적인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었다는 급보를 전한 것이었습니다서구 열강들의 청나라 침략 행위는 중화사대적 사상을 갖고 있던 조선조정과 조선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이에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과 사교금압정책으로 모든 상황을 전환하였습니다이 시기에 운현궁(雲峴宮)에 천주교가 전파되어 신자가 있다는 소문과 함께 조대비(趙大妃)와 그를 추종하는 반천주교 권력자들은 천주교와 타협하려는 흥선대원군을 압박함으로서 정치적 공세에 몰린 대원군이 곧바로 천주교 박해령을 선포하였습니다.

 

1866년 2베르뇌를 시작으로 홍봉주남종삼김면호정의배전장운최형” 등 천주교 지도자들과 8천명의 천주교인들이 서울과 그 밖의 현지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였습니다.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와 프랑스 신부 9명은 서울 새남터와 충남 보령의 갈매못에서 효시되는 등 순교자가 되었습니다그 외에도 깊은 산으로 피신중에 질병과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사망하는 등 조선 전국에서 피비린내나는 살육이 자행되었습니다.

 

➀ 병인양요(1866(고종3),丙寅洋擾,병인사옥)

 

박해를 피해 피신중인 프랑스 리델”(Ridel, 李福明신부가 1866년 7월에 조선을 극적으로 탈출청나라 텐진으로 이동하여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Roze,P.G.)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이에 로즈 사령관이 10월경 7척의 군함을 동원하여 무력시위를 강행하였습니다이것이 병인양요”(丙寅洋擾,병인사옥)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로즈 사령관은 1016강화부를 점령하고 프랑스 선교사 12명 가운데 9명의 학살에 대한 강경한 보복응징을 선포하였습니다군함 7함재 대포10총병력 1천명 등 군사력을 압도하는 프랑스군의 화력앞에 조선군은 추풍낙엽과 같았습니다이에 제주목사 양헌수가 천총에 임명되어 강화도 수복작전을 성공시킴으로서 1110프랑스군은 함대 철수를 결정하였습니다그러나 프랑스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강화대 일대에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고 외규장각을 유실시켰으며, 20만프랑의 금은보화조선시대 의궤 300여권을 약탈해 감으로서 리델 신부가 조선에 온 근본적인 목적을 실현하고자 했던 천주교 신앙의 정신은 의심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병인양요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는 2단계에 들어가며 압박수위를 더욱 가속화 하였습니다천주교 신자들을 외부와 내통하여 도적을 불러드리는 통외초구”(通外招寇)로 간주하여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처형하였습니다흥선대원군의 분노는 서양인들이 더렵혀진 땅은 그들과 내통한 자들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는 공포정치로 서울과 경기해안 지방의 천주교를 초토화 시켰습니다.

 

1868년 4, “오페르트”(Oppert)는 제2차 통상요구를 조선이 거부하자 흥선대원군의 부친 분묘를 도굴할 계획을 세우고 충남 덕산 남연군묘(南延君墓도굴사건을 진행하지만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이 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크게 분노하였고천주교회 설립의 태동지 중에 한 곳 이었던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처형을 단행하였습니다.

 

➁ 신미양요(1871(고종8),辛未洋擾)

 

1866년 8, “신미양요”(辛未洋擾)는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 미국인에 대한 평양시민의 공격으로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가 침몰한 것에 대한 응징 보복으로 발생한 조미전쟁이었습니다미국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Rodgers, J.)는 기함 콜로라도호(Colorado)를 비롯하여 군함 5수해병 1,230함재대포 85문을 적재하고 인천해안에 정박하였습니다강화해협 손돌목에 미국 함대가 이르렀을 때 연안 강화포대로부터 공격을 받아 조미간 군사적 충돌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사건을 손돌목 포격사건이라고 칭하였습니다조선 영토내 평화적 탐측활동에 대한 공격을 빌미로 미국은 조선대표단 협상과 포격사건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였습니다이에 불복한 조선과 미국은 610일 역사상 최초의 전쟁이 발생하였습니다미국 해군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초지진과 덕진진과 광성보를 일시에 점거하고 성조기를 게양하였습니다그러나 미국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으로 인하여 외교를 단념하고 73일 함대를 전원 철수하였습니다.

 

신미양요의 승전아닌 승전을 계기로 조선내에 쇄국양이를 국시로 선포하고 잔존 천주교 세력에 대한 처형을 가속화 하였습니다조선 최대의 박해로 가장 많은 순교자를 기록한 병인박해는 천주교에 대한 전쟁선포와 같이 초토화 작전을 감행하였습니다이것은 서기 식민세력에 대한 대항과 맞물리면서 더욱더 강화된 측면이 있지만 이토록 많은 백성을 도륙한 예는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병인박해에 대한 충격적인 비화는 1890주교 뮈텔”(Mutel, 閔德孝)이 작성한 치명일기에 남겨져 후대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병인박해는 영국과 유럽의 나라에서도 이례적으로 다루었으며 흥선대원군에 대하여 순교자의 나라 조선국이라는 이름을 갖게 한 악명 높은 존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8) 순교자 이후 신앙의 자유시대를 맞이하는 조선

 

병인박해 10년후 1876프랑스 블랑 백”(Jean Marie Gusttave Blanc) 신부와 드게트 최”(Victor Marie Deguette) 신부그리고 리델” 신부가 로마 교황의 대리로 신규임명을 받고 1877년 재입국하였습니다그러나 1878년 128천주교인 최지역가택에서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른후 국외 추방하였습니다흥선대원군의 실각후 일본과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고 조선국내 정세는 급변하였습니다. 1882년 6, “조미조약이 체결되고, 7월에는 조영조약과 조독조약이 체결되는 등 조선은 세계열강들의 각축장으로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1886년 64, “조불조약” 체결후엔 천주교에 대한 더 이상의 박해는 중단되었고 종교의 자유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영국과 독일은 조선과의 조약체결에서 지정된 지역에서 자국민에 대한 선교의 자유”(42)를 규정하여 종교의 자유를 합의 하였습니다. 26명의 신부 가운데 12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프랑스는 학습혹교회 어음문자격치율예예기자 균득보호라는 생소한 문구를 삽입하여 종교의 자유와 범위를 한층 더 구체화 하고 확대하였습니다이로서 기독교는 조선국 전역에서 자유로운 선교활동이 가능하며 카톨릭과 개신교 모두 기독교 목회자들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고 증거할 자유를 갖도록 하였습니다더 나아가 교회와 대학병원을 설립할 권한을 갖고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다는 이유로 어떠한 처벌이나 제한을 받지 않도록 규정하였습니다지방관청에서도 어떠한 처벌과 강제를 할수 없도록 함으로서 이 규정이 조선 전국에 걸쳐 유효함을 합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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