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신앙 아카데미 Ⅲ)
성화와 함께 보는 요한 묵시록
1. 해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묵시 1,1)라는 말로 시작되는 요한 묵시록은 실제로 이 세상의 종말과 심판에 관한 장면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종말이 임박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촉구하고 동시에 이 세상의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굳건하게 살아가도록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함이다. 이를 간과하거나 단순히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받아들인다면 묵시록이 주는 참된 메시지를 놓쳐 버리고 말 것이다.
①저자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네 번씩이나 자신을 요한이라고 밝힌다.(1,1.4.9;22,8) 그러나 그를 요한복음서의 저자와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두 책에 나타나는 언어와 사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도 요한복음서의 저자와 동시대인이며 사도 요한의 제자로서 ‘요한 학파’에 속해 있었던 사람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요한 묵시록 안에는 저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말이 없고, 다만 하느님의 “종”(1,1)으로서,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환난을 겪는 그리스도인 독자들의 ‘형제’로서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증언 때문에 파트모스 섬에 갇혀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다.(1,9) 그는 일곱 교회에 회람 형식으로 편지를 보낸 발신인이다.(2-3장) 따라서 요한 묵시록 전체를 편지로 간주한다면 요한이 굳이 사도 요한이 아니더라도 저자의 실제 이름이 요한이었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
한편 요한 묵시록에는 구약성경, 특히 이사야서, 예례미야서, 에제키엘서, 다니엘서뿐 아니라 즈카르야서와 시편 등 수없이 많이 인용되어 있다. 그리고 신·구약 중간 시기에 성행했던 유다 묵시문학 증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부분도 많이 발견된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보아 저자는 구약 성경에 능통하고 유다 묵시문학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계시된 진리를 더 많이 신뢰하여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희망의 메시지를 길어 낸다.
②집필 시기
이레네우스의 『이단 반박』에 따르면 요한 묵시록이 “도미티아누스 황제 통치 말경”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의 통치 기간이 81-96년임을 감안할 때 집필 시기를 95년경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1세기 후반 로마제국의 통치 역사는 참으로 격변기였다.
*49년: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로마 추방
*54년: 네로 황제 등극
*64년: 로마 화재, 첫 번째 그리스도교 박해
*66년: 유다 항쟁
*68-69년: 네로의 자살, 3 황제 등극(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69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등극
*70년: 티투스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
*79년: 티투스 황제 등극
*81년: 티투스 사망, 도미티아누스 황제 등극, 그리스도교 박해
*96년: 도미티아누스 황제 사망
이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유다교와의 관계 안에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한편 황제 숭배 사상을 강요하는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았다.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에 따르면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기 자신을 신격화여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해 박해를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자는 당시 추방, 고문, 순교까지 감당해야 했다. 반면 배교자도 줄을 이었다. 요한 묵시록 2-3장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 안에서 이러한 긴장과 분열의 시련을 겪고 있는 당시 공동체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또 14-18장에 나오는 ‘바빌론’이라는 명칭은 종교 박해를 가하는 로마 제국을 가리킨다.
③집필 동기와 목적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실 때, 그들도 당신이 고통을 겪으신 것처럼 고통당해야 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요한 15,18-27) 그래서 그분은 그들이 하느님께 적대적인 세상, 증오와 탐욕이 가득한 세상과 대면해야 하리라고 그들에게 일러주셨다.(루카 12,49-53) 하지만 그들은 모진 박해의 날들을 위해 완전하게 준비되어 있지 못했다. 그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붙들려 가고 있었고, 사랑하는 이들이 고문당하고 있었으며, 형제자매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 신자들은 동요했고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냥 항복하는 것이, 신앙을 포기하고 안위를 찾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 ‘우리 하느님은 지상의 그 어떤 세력보다도 강하신 분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왜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지 않는가? 어째서 우리를 고문하고 죽이는 잔인한 적들의 손에서 구하기 위해 개입하지 않으셨는가?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구원될 것인가?’
모진 박해는 저항하는 자들을 제거했고, 나약한 이들을 굴복시켰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은 갈수록 패색이 짙어 가는 싸움을 포기하기 시작하였다. 다른 이들에게 희망이자 격려가 되고 있던 공동체의 지도자들도 계획적으로 제거되었다. 바로 이런 위기 상황이 요한 묵시록을 낳았다.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때문에”(1,9) 환난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쓰였다. 저자는 정의와 심판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머지않아 멸망하게 될 악의 세력을 경계하도록 가르친다. 아울러 종말에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며 희망을 노래한다.(22,20)
④신학 사상
요한 묵시록(아포칼립시스: 계시, 묵시, 폭로)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보내는 편지 형식을 취한 묵시문학이며 또한 예언이다. 저자는 이 책을 “계시”(1,1)라고 정의하면서 동시에 “예언의 말씀”(1,3; 22.7.10.18)이라고 묘사한다. 저자는 단순히 로마 제국을 비판하는 정도가 아니라 철저하게 배격한다. 따라서 자신의 메시지가 로마 당국에 발각되면 더 강한 박해가 예상되므로 저자는 비밀스러운 암호 같은 상징으로 그것을 감추어야 했고, 묵시문학을 활용하게 된다. 또한 이 책은 예언적인 요소가 많다. 가령 일곱 교회에 보내는 예언적 메시지를 비롯하여 전체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강한 경고와 권고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일들을 예고함으로써 현재 삶의 회개와 도약을 이끌어 내고자 한다. 그러므로 요한 묵시록의 환시는 언제나 말씀을 동반할 뿐 아니라 현재의 고통 속에서 미래의 희망을 일깨우는 등 예언의 여러 특징을 띠고 있다.
기본적으로 유다 묵시문학(다니엘서 7장 비교)과 맥락을 같이하는 요한 묵시록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 환시와 함께 상징적 숫자와 짐승들, 우주적 재앙 등이 수시로 등장하는 등 그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들이 신비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뜻을 알 수 없는 표현들과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문학적 구조 아래 뛰어난 내적 일관성과 통일성이 흐르고 있다.
둘째, 천상 세계와 지상 세계, 선과 악은 극적인 대립 상태에 있으며 인류는 그 가운데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저자는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하느님 나라의 결정적인 승리와 사탄과 모든 악의 세력이 당할 최종적인 패배를 예고함으로써 어떠한 경우에도 적대 세력에 굴복하지 말라고 설파한다.
셋째, 요한 묵시록은 그리스도 중심주의 작품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고통을 받고 죽었다가 부활하시어 승리하신 주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예수님께서 살해되었으나 승리하신 어린양처럼(1,5-8; 5,6)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이라는 진리를 펼쳐 보인다.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골고타의 고난에도 동참해야 한다. 그러므로 박해받는 이들에게 환난 중에 인내하는 충실성은 필수 불가결한 덕이다. 한편 그리스도는 계시자의 역할을 맡으면서 천상의 전사요 판관의 역할도 맡는다.(12,10-11) 옛 세상은 사리지고 새 세상이 도래한다. 이 책은 당신이 영광중에 다시 오시어 모든 인간들을 심판하시면서 선한 이들에게는 보상하시고 악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징벌을 내리시리라는 그리스도의 재림 약속을 재확인하고 있다. 또한 어떤 특정한 집단이 제아무리 커다란 세력을 휘두르더라도 그 힘은 하느님의 권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모든 세대의 제자들에게 일깨운다. 특히 요한 묵시록의 종말론은 “사람의 아들 같은 분”(1,13)이라는 신적인 표상으로 예수님을 묘사하거나,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5,6)을 부활하신 메시아의 모습으로 표현함으로써 구원의 현재성을 드러내고 있다.
넷째, 요한 묵시록은 교회 전례와 관련이 있다. 기본적으로 한 사람이 읽고 많은 사람이 듣는 구조이다.(1,3;22,7) “주 예수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22,21)라는 말은 전례 모임에서 사용되는 인사말이다. 또한 저자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를 대상으로 글을 쓴다고 밝히고 있으며 자신이 주님의 날에 계시를 받았다고 말한다.(1,10) 그 계시의 내용은 ‘살해된 어린양’의 파스카 사건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도래하고 하느님의 주권이 회복되리라는 것이다. 4-5장에서 천사들, 원로들, 생물들은 통해 전개되는 상징적, 전례적 차원은 ‘살해된 어린양’의 승리와 그에 대한 공동체적 찬미를 보여 준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4,8)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5,13) 요한 묵시록은 이처럼 그 자체로 신구약 성경과 인류 역사상 결코 중단된 적이 없는 미사, 그 희생 제사에 대한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⑤구조와 내용
-1,1-3: 머리말
-1,4-3,22: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a. 1,4-8: 인사말
b. 1,9-20: 도입 환시
c. 2,1-3,22: 일곱 편지
-4,1-11,19: 심판에서 구원으로
a. 4,1-8,1: 일곱 봉인
b. 8,2-11,19: 일곱 나팔
-12,1-22,5: 새 하늘과 새 땅
a. 12,1-15,8: 세 표징
b. 16,1-22: 일곱 대접
-22,6-21: 맺음말
2. 각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묵시 1,1-3
머리말은 요한 묵시록 전체에 신적 권위를 부여한다. 즉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 계시를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를 통해 당신의 종 요한에게 전달하셨다. 그 이름부터가 계시를 가리키는 책인 요한 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한 구원의 계시를 이미 알려진 사실로 전제하고 있다.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이나 “그때가 다가왔기 때문”은 묵시문학적 표현으로 하느님 계획이 실현될 때가 임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머리말 마지막에 묵시록의 일곱 행복 선언(1,3;14,13;16,15;19,9;20,6;22,7;22,14) 가운데 첫 번째 행복 선언이 나온다. 이로써 계시는 증언을 부르고, 더 나아가 예언과 연결된다. 그 계시를 전달 받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또한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다 해야 하며 예언을 받아들여 종말에 대비해야 한다.
*요한의 소명: 묵시 1,9-20
*12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교회(일곱 개의 황금 등잔대) 안에 현존하시며, 당신 백성과 아주 가까이 계신다. 그리스도를 뵙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교회를 보기만 하면 된다.
*13-16절: 그리스도 신체가 아니라 그분의 속성에 대한 나열이다. 요한이 다니엘서에서 빌려 와 사용하고 있는 표상들(7,9-13;10,5-6)은 엄위로운 주 그리스도의 권능과 영광을 나타낸다. 요한은 본래 하느님께만 적용된 이러한 표상들을 그리스도께 적용시킴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모든 면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동등하시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모든 예언의 실현 그 자체라는 것을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그리스도는 임금의 권위(금띠)를 지닌 사제(긴 옷)로 묘사되며, 또한 영원한 지혜(햐얀 머리와 머리털)로서 모든 것을 다 아시고(불꽃 같은 눈) 변함없으시며(놋쇠 같은 발), 당신의 위엄으로 존경과 경의를 명하시는 분(큰 물소리 같은 목소리)이다. 그분의 입에서 나온 칼은 인간들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가 꿰뚫고 심판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17-18절: 요한은 그리스도의 위엄에 합당한 형태의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긴 승리와 부활의 영광은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는다.
*19-20절: 하느님 말씀의 증인이었던 그가 이제는 예언자이며 작가가 된다. 이제 요한은 부르심에 따라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글을 써 보내야 한다. (성경 지도 참조) 그들은 과연 박해를 잘 견디어 내고 있는가? 그들의 좋은 점은 무엇이며 나쁜 점은 무엇인가? 그 편지는 수신지-그리스도의 자기소개-칭찬과 책망-권고-약속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에페소에 보내는 편지: 묵시 2,1-7
당시 에페소는 소아시아의 서쪽 해변에 위치한 큰 항구 도시로서 여행, 무역, 상업의 중심지였고, 로마 속령 ‘아시아’ 지역의 로마 총독 소재지였다. 또한 에페소는 여섯 개의 황제 신전들의 소재지로서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는 황제 숭배의 중심지이기도 했다.(사도 19,35) 그런가하면 1세기 중엽부터 에페소는 중요한 그리스도교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사도 18-20장; 1코린 15,32; 16,8) 바오로 사도가 이곳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후 에페소는 아시아 선교의 거점 역할을 하였다.(사도 19,10) 사도 요한이 생애 마지막 시기(1세기 말-2세기 초)를 이곳에서 지낸 것으로도 전해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에페소 교회에 당신 자신을 밝히시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1절), 말하자면 완전한 권위를 지닌 분으로 소개하신다. 그분은 에페소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서 훌륭한 면은 칭찬하시고(2-3절), 단점들에 대해서는 책망하신다.(4-5절) 사실 에페소인들은 열심히 노력하였고 그리스도인로서 박해를 잘 견디어 냈다.(야고 1,2-4; 1베드 1,6-7;2,11-19;3,13-4,6) 또한 그들은 거짓 사도들을 가려낼 줄 알았다. 초대 교회의 순회 설교자들 가운데는 교회에서 정식으로 파견 받지 못한 사람들이 사도 행세를 하고 다닌 사례가 있었다. 한편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4절)은 에페소 교회가 바오로 사도 시대부터 싹튼 첫사랑,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약해진 것에 대한 꾸지람이다. 그들은 그 첫사랑을 기억하여 회개하고 처음에 했던 대로 하라는 특별 권고를 듣는다.(5절)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버리겠다.”(5절)는 말씀에서 등잔대는 교회를 의미하므로 이는 교회를 없애 버리겠다는 단호한 질책으로 해석해야 한다. 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니콜라오스파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서는 좋게 말씀하신다.(6절)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7절, 창세 2,9)은 영원한 생명을 말한다.
*스르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 묵시 2,8-11
스미르나(오늘날 이즈미르)는 에페소에서 북쪽으로 약 120킬로미터 떨어진 아름다운 항구 도시로 “아시아의 매력”이라는 별칭처럼 그리스-로마 시대에 번영했다. 기원전 193년에 스미르나는 소아시아에서 로마의 신들을 공경하는 신전이 세워진 최초의 도시가 되었다. 기원후 23년에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과거의 황제 아우구스투수와 그의 어머니 리비아, 그리고 원로원을 기념하는 성전을 짓도록 했다. 스미르나는 과학과 의술의 중심지였고 건축과 음식 등 부유함의 대명사였으며, 기원후 2세기에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스미르나 교회는 고난을 겪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굳게세 견디어 내고 있었다.(9절) 그러나 그 가난은 영적으로 부유함이다. 스미르나에는 유다인들이 많이 살았다. 이들은 복음의 메시지를 배척하고 복음 전파를 방해했다. “중상”이란 말은 일부 유다인들이 로마 관리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을 고발한 것을 의미한다. 그 악마 같은 유다인들이 가하는 박해는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10은 충만수이다. 그러나 여기서 열흘은 다니엘과 그의 동료들에게 주어진 시험 기간(다니 1,12)을 연상시킨다. 곧 한정된 시간을 의미한다. 스미르나 교회는 주님께 아무런 꾸중도 듣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이며 두 번 째 죽음도 면하게 될 것이다. 유다 사상이나 초대교회 사후관에 의하면 사람이 일단 “첫째 죽음” 후 어떤 대기소(=고성소, 셔올, 저승) 같은 곳에 들어가서 마지막 심판날까지 기다리는 중간상태가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첫 째 죽음은 육신의 죽음이고 둘 번 째 죽음은 세상에서 하느님께 불충했던 죄인들이 최후 심판 후 맛보게 될 “영혼의 죽음”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승리한 자에게는 둘 째 죽음, 지옥벌이 오지 않는다.
*페르가몬 교회에 보내는 편지: 묵시 2,12-17
페르가몬(오늘날의 베르가마)는 소아시아에서 중요한 도시로서 스미르나 북쪽에 위치해 있다. 지중해에서 약 24킬로미터 떨어진 이 도시는 기원전 3세기에 로마의 동맹국이 되었고 그 이후 소아시아의 첫 번째 로마 속주가 되었다. 소아시아에서 처음으로 황제 숭배를 공식화한 곳일 뿐 아니라 로마 신전이 많기 때문에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13절)이라 불릴 만했다. 에페소나 스미르나와는 달리 고대 세계의 대도서관들 중의 하나가 있었고, 출판도 이루어져 ‘양피지(parchment)’라는 말도 이 도시(Bergama) 이름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페르가몬 교회를 대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날카로운 쌍날칼을 가진 이”(12절; 1,16참조)라고 표현하심으로써 심판자로서의 권위를 나타내신다. 성경에서 쌍날칼은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지칭한다. 죽음을 당한 안티파스를 묘사하는 “증인”(13절)은 ‘마르튀스’, 곧 순교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페르가몬 교회에는 발라암 추종자들과 니콜라오스 추종자들 두 파가 있었다. 그러나 어원상 이 두 말은 같은 말이다. 즉, 히브리어 발라암은 “백성”+“정복하다.”, 니콜라오스는 “정복하다.”+“백성”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 둘은 모두 백성을 정복해서 나쁜 영향을 끼친 사람들로 본다. 여기서 발라암의 가르침은 민수 31,16 이하의 발락 이야기와 연관이 있다. 즉, 우상숭배와 불륜이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흰 돌”은 고대 유다에서 축제에 앞서 참여할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입장권 구실의 하얀 조약돌에서 유래한 것 같다. 차츰 이 “흰 돌”은 현세에서의 축제뿐 아니라 천상 잔치에 참여할 권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또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는 투표할 때 흰 돌은 동의를, 검은 돌은 거부를 표시했다. 이처럼 “흰 돌”은 의사표현 능력을 상징하며 동시에 천상 잔치, 곧 하느님 나라에 참여할 권리를 상징한다고 하겠다.
*티아타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 묵시 2,18-29
티아타라(오늘날의 아키사르)는 리디아 북쪽, 페르가몬과 사르디스 사이에 위치한다. 이 도시는 에게 해 지역의 상업 중심지로서 직물과 염색 등의 동업자 조합이 많았으며, 바오로 사도에게서 세례를 받은 자색 옷감 장수 리디아의 고향이기도 했다.(사도 16,14)
묵시록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이곳에 한 번 나온다. 그런 만큼 여기에서서는 유난히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부자 관계가 강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이제벨이라는 거짓 예언자와 맺는 관계를 “여자”(20절)와 “그의 자녀들”(23절)로 표현한 것과 대조되어 나타난다. 에페소 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티아티라 교회도 “사랑과 믿음과 봉사와 인내”(19절)로 인해 칭찬을 받는다. 하지만 에페소 교회가 ‘거짓 사도’를 밝혀낸 것과는 달리 티아티라 교회가 ‘거짓 예언자’ 이제벨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책망거리가 된다.(1열왕 16,31-33; 2열왕 9,22참조) 티아티라 교회에서도 이제벨은 악한 영향을 끼쳐 페르가몬 교회의 경우처럼 불륜과 우상 숭배가 만연하도록 했기 때문에(14,20) 그녀는 “사탄”(24절)에 비유되고, 그녀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간음하는 자들”(22절)이라는 비난을 듣게 된다. 티아티라 교회는 “너희가 가진 것을 굳게 지켜라.”(25절)하는 특별 권고를 듣는다. 그리하여 승리하는 이들이 “쇠 지팡이”(27절)를 지니고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부자 관계에도 참여하게 될 것이다.(28절) 여기서 샛별의 약속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리라는 약속이다.
*사르디스 교회에 보내는 편지: 묵시 3,1-6
사르디스는 티아티라의 남동쪽, 스미르나의 동쪽에 위치한 부유하고 화려한 도시로,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다. 이 도시는 기원전 190녀부터 133년까지 페르가몬에 속해 있다가 그 이후에는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기원후 17년 지진으로 파괴될 때까지 기념비적인 건물들과 신전들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재건된 다음에 세워진 신전은 아우구스투스에게 봉헌되었다. 묵시록 당시에는 그저 양털과 모직물의 집산지로 알려져 있었다.
사르디스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는 앞에서 이미 언급된 하느님의 “일곱 영”(1,4)과 “일곱 별”(1,16)을 지닌 이로 묘사된다.(1절) 사르디스 교회는 칭찬은 조금 받고 질책은 많이 당한다. 이 교회는 활발하게 움직이며 살아 있다고 간주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가 지닌 생명력을 빠른 속도로 잃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무 늦기 전에 깨어나 죽어 가는 것들에 생명력을 불어 넣으라는 경고를 듣는다.(2절) 그리고 이러한 권고는 회개하고 가르침대로 살아가라는 권고로 구체화된다.(3절) 그리스도께서 도둑처럼 임하실 테니 깨어 있으라는 표현(마태 24,42-44; 마르 13,33)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지만, 이것 또한 회개의 권고를 뒷받침하고 있다.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4절)은 이교도 정신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이며, “흰옷”은 부활과 영광받은 몸의 초월적 상태를 의미한다. “생명의 책”(5절)에 이름이 적힌다는 것은 다니 12,1에 나온다. 그 속에 이름이 적힌 사람은 환난을 면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차지할 것이라 한다.
*필라델피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 묵시 3,7-13
“형제애”라는 의미의 필라델피아(오늘날의 알라쉐히르)는 사르디스 남동쪽에 있는 작은 도시로 트몰로스 산맥 아래에 위치해 있다. 기원후 17년 지진으로 피해가 컸으나 티베리우스 황제의 원조로 복구된 후 황제 숭배 사상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필라델피아는 토지가 비옥하였고 포도 재배로 이름이 나 있었다.
거룩하신 이(하바 3,3), 진실한 이(이사 49,7),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이사 22,22)는 구약에서 하느님께 적용되었던 호칭이다. 이를 지금 그리스도께 적용시키고 있다. “문을 네 앞에 열어 두었다.”(8절) 표현은 사도들 선교의 성공을 말한다.(1코린 16,9) 필라델피아 교회는 예외적으로 잘 해 나가고 있는 교회라고 인정을 받는다. 이 교회는 스미르나 교회처럼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가난하고 약했지만 축복과 순종과 인내에 있어서는 부유한 교회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장차 다가올 종말론적 시련 속에서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겠다고 말씀하신다.(10절) 또한 그런 시련을 딛고 승리한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성전에서 기둥이 되는 특전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신다.(12절) 이 표현은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뜻이다.
*라오디케이아 교회: 묵시 3,14-22
사도 바오로도 콜로 4,15-16에서 언급한 바 있는 라오디케이아는 기원전 3세기에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고, 모직물이 성행한 상업도시요 무역과 은행도시였으며, 의학도 상당히 발달했다. 특히 안약이 유명해서 수출도 했다. 그래서 여기에도 안약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기원전 250년경에 건설된 도시로 안티오코스 2세는 디오스폴리스를 셀레우코스 왕국의 기점으로 요새화하고 자기 아내 또는 여동생 라오디케의 이름을 따서 라오디케이아로 지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16절)라고 하시며, 라오디케이아 교회에게 가장 엄하게 경고하신다. 그들은 뜨겁지도 차지도 않을뿐더러 부유하고 풍족하지만 실제로는 비참하고 가련하다고 지적하신다.(17절) 하지만 혹독한 질책의 말씀을 담은 이 짤막한 편지에는 회개를 권유하는 가장 절실한 간청도 아울러 담겨 있다. 책망하고 징계하는 것은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이다. (19절) 아무리 부자라도 “정련된 금”처럼 믿음으로 단련된 부자일 것, “흰옷”을 입듯 영적인 생활로 수치스러운 부분을 승화시킬 것, “안약”을 눈에 바르듯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시력을 정비하고 바라볼 것 등이 참으로 부자 되는 길이라 가르쳐주신다. 또 그분은 일상생활 속에서 당신의 현존을 알아차리도록 우리에게 겸허하게 청하신다.(20절) 20-21절의 종말론적인 약속은 20,4에서 성취된다. 그런데 이 표현은 루카 22,30에도 있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요약
교회 |
에페소 |
스미르나 |
페르가몬 |
티아티라 |
사르디스 |
필라델피아 |
라오디케이아 |
장절 |
2,1-7 |
2,8-11 |
2,12-17 |
2,18-29 |
3,1-6 |
3,7-13 |
3,14-22 |
주님의 모습 |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 |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죽었다가 살아난 이 |
날카로운 쌍날칼을 가진 이 |
불꽃 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을 가진 이, 하느님의 아들 |
하느님의 일곱 영가 일곱 별을 가진 이 |
거룩한 이, 진실한 이,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는 이 |
아멘 그 자체이고 성실하고 참된 증인이며 하느님 창조의 근원인 이 |
교회의 상태 |
신실함으로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않고 거짓사도들을 가려내었음. |
사탄을 추종하는 자들의 방해에도 굴하지 아니했음. |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에서 신앙을 굳게 지키고 있음. |
여 예언자로 자처하는 이제벨을 용인함 |
이름만 있을 뿐 교회로서의 기능은 없었음. |
힘이 약한데도 주님께 충성하였음. 선교 성공한 교회 |
부유하지만 영적으로 가난한 교회 |
칭찬 및 격려 |
인내를 가지고 고난 속에서도 지치지 않음. |
환난과 궁핍 속에서도 영적으로 부유함. |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음. |
사랑과 믿음과 봉사와 인내, 처음보다 더 많은 일을 함. |
신자 일부가 순결을 지킨 것에 관하여 |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을 지키며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음. |
없음. |
책망 및 경고 |
첫 사랑을 저버림. 등잔대를 치워 버림. |
없음 |
발락과 니콜라오스파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질책하고 경고함. |
이제벨을 추종, 우상숭배 및 불륜 지적, 자녀들을 죽게 하겠음. |
실행이 없는 죽은 믿음을 지적. 도둑처럼 불시에 재림할 것. |
없음. |
차지도 뜨겁지도 않음을 지적하고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고 경고 |
당부 및 촉구 |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다시 함. |
환난을 두려하지 말고 충실할 것. |
회개할 것. |
재림 때까지 회개라고 믿음을 굳게 지킬 것. |
회개하고 깨어 있어라. |
승리의 화관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믿음을 굳게 지킬 것. |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라. 문을 두드리면 열고 주님과 함께 생활하라. |
적용 대상 |
첫 사랑과 처음의 일을 버린 채 주님의 뜻에 어긋나게 행하는 신자 |
비록 삶이 궁핍하고 고난의 연속이나 주님을 충실히 추종하는 신자 |
거짓교사들의 현혹에 넘어가 이 세상과 결탁한 신자 |
우상숭배와 불륜에 빠진 신자 |
신앙의 열매 맺지 못하는 허울뿐인 신자 |
시련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신자 |
풍요롭지만 미온적인 신앙을 가진 신자 |
보상 약속 |
“하느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해 주겠다.” |
“승리하는 사람은 두 번째 죽음의 화를 입지 않을 것이다.” |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숨겨진 만나를 주고 흰 돌도 주겠다.” |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한과 샛별을 주겠다.” |
“흰 옷을 입고 생명의 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으리라.” |
“하느님 성전의 기둥으로 삼고,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하느님의 이름을 새겨 주겠다.” |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겠다.” |
묵시록에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일곱 봉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등 일곱 시리즈가 등장한다. 이 가운데 일곱 봉인과 나팔은 요한 묵시록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묵시 4,1-11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황제는 최상의 권력과 위엄을 행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카이사르 역시 언젠가는 죽을 유한한 존재로서 하느님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하느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묘사함으로써 하느님의 절대적인 권위와 그분께 충실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을 나타내고자 한다. 4장은 하느님이 계신 천국에서 일어나는 상황의 묘사다. ‘이리 올라오너라.’는 새로운 환시를 보여주기 위한 초대의 말이다. 초대받은 사람만이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고, 하느님의 특별한 계획을 알 수 있다.(탈출 19,24 참조) 옥좌는 4장의 중심이다. 하늘나라 주권자의 자리요, 따라서 거기 앉으신 분을 장엄하게 묘사한다. 여기서 나오는 보석들과 무지개는 하늘나라를 지극히 신비롭고 휘황찬란한 영역으로 묘사함으로써 만물을 지배하시는 분의 위엄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하느님께서는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쓴 원로 24명에게 둘러 싸여 계신다. 여기서 24는 12+12로서 이스라엘 12지파와 새 이스라엘의 12사도로 볼 수 있다.(21,12-14 참조) 또한 “흰옷”은 초월적인 것을, “옥좌”는 권위를, “금관”은 그들이 받을 상급을 상징한다. 24원로는 실제 인물이라기보다 천상 하느님 백성의 상징적 모습이다. 그 어좌에서는 지상 세계를 넘어서는 위엄과 권세를 상징하는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울린다. 또한 번개와 천둥은 시나이 산에서의 신현을 연상시킨다.(탈출 19,16) 일곱 횃불은 원래 예루살렘 성전의 7지 촛대를 상기시키나, 여기서는 하느님의 총체적인 영이다. 또 수정처럼 보이는 유리바다는 모든 악의 세력이 사라지고 새 세상이 도래했을 때의 투명한 바다이다. 자고로 바다는 검푸르고 밑이 보이지 않아 악의 세력이 숨어 있다고 보았다. 그뿐 아니라 어좌 둘레에는 신비로운 생물 네 마리가 자리 잡고 있다.(에제 1,4-12 참조) 네 생물은 하느님의 옥좌 앞에서 끊임없이 창조주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창조물 중 가장 강하고 가장 고귀한 존재들이다. 사자는 야생동물 중, 송아지는 가축 중, 독수리는 날짐승 중, 인간은 창조물 중 가장 고귀한 존재다. 사자의 위엄, 황소의 힘, 사람의 지성, 그리고 독수리의 드높은 비상을 통해 드리는 찬미는 그들을 만드신 창조주의 위대함을 향한 깊은 경배가 된다. 후대 교부들은 이 네 생물을 영성적으로 재해석하여 4복음사가를 가리킨다고 했다. 여섯 날개는 에제키엘 예언서에서 말하는 세라핌, 게르빔, 오판임 세 천사의 모든 특징을 한꺼번에 따로따로 분리시켜 표상해 놓은 것이다. ‘사방으로 눈이 가득 달려 있다.’고 했는데, 이는 무엇이든지 다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눈이 많기 때문에 한 쪽 눈을 감고 있어도 한 쪽은 눈은 뜨고 있기에 다 볼 수 있다. 또 이 눈은 성령을 상징한다. 사실 진리의 영은 언제 어디서든 모든 것을 다 아신다. 네 생물의 ‘거룩하시다’ 외침은 이사 6,2-3을 인용한 것으로 하느님의 성성과 권능과 영원성을 말한다. 거기에 덧붙여 그들은 하느님을 모든 역사 및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주관하시는 분으로 찬미한다. (8절) 나머지 절은 원로들의 장엄한 경배와 찬미노래로써 다니 2-3장과 7장에 묘사된 장엄한 전례를 반향한다.
*봉인된 두루마리와 어린양: 묵시 5,1-14
4장에서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가 다뤄졌다면 5장에서는 구세주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5장은 이 모든 계시가 요한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류 전체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은 일곱 번 봉인된 두루마리에 의해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잇다. 하지만 이 두루마리는 봉인되어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 속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모른다. 게다가 그것을 펴거나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요한은 슬피 운다. 요한의 비통한 슬픔은 현실 안에서 그 자신과 온 교회가 겪는 크나큰 고통에서 기인한다. 고통의 원인과 의미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은 더욱 극심해진다. 봉인된 두루마리 속에는 바로 그 고통의 신비, 즉 모든 시대 사람들이 피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고통의 신비가 들어 있다. 그런데 그 신비를 이제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신다. 원로 가운데 하나가 말한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창세 49,9)와 “다윗의 뿌리”(이사 11,1)는 구약의 메시아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승리”라는 표현이 덧붙여져 신약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시고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신 그 힘으로 봉인을 뜯을 수 있다. 그분은 다윗처럼 막강한 전사는 아니었지만 그분의 승리는 훨씬 더 완전하고 결정적인 것이었다. 어린양이신 그분은 고통을 겪으심으로써 승리하는 사자가 되신다. 그분이 살해된 어린양처럼 죽음을 맞으신 것은 인류를 하느님과 결합시키기 위함이었다. 그 어린양이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서 있었다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부활의 영광을 차지한 모습을 상징한다. 일곱 영은 성령의 활동을 총칭한다. 또 수금은 찬미가이고, 향은 저자 말대로 “성도들의 기도”이다.(시편 141,2참조) 예수님께서는 친히 완전한 제물이 되시어 인류를 하느님과 다시 결합시키셨다.(9절) 또 그분의 제자들은 사제의 백성, 임금의 백성이 되어 지상에서 그분의 사명을 이어받는다. 결국 어린양은 두루마리에 담긴 계시의 비밀 그 자체이시다. 이제 남은 일은 이 신비를 경외감 속에서 경배하는 것뿐이다.(13-14절) ‘권능, 부, 지혜, 힘, 영예, 영광, 찬미’ 이 7가지 용어로 그리스도 찬미를 끝맺는다.
*처음 여섯 봉인의 개봉: 묵시 6,1-17
요한은 천상 영광의 장면을 떠나 이제 지상으로 눈을 돌려 일곱 봉인을 하나하나 뜯을 때마다 일어나는 사건을 묘사한다. 특히 네 기사는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의 발전과정을 밝힌다고 볼 수 있다. 이 발전 과정 안에는 부정적 세력도 있고(전쟁, 기아, 페스트), 그에 맞서는 선의 세력도 있다.(흰말로 상징화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힘) 이 선의 세력은 마지막 때 결정적 승리를 거둘 것이다.(19,11 이하 참조) 참고로 흰색-승리, 붉은색-반목과 전쟁, 검은색-기근, 푸르스름한 색-죽음을 상징한다. 특히 검은 말은 기사가 든 저울과 함께 기근을 상징한다. 92년에 기근이 소아시아를 강타해서 국가의 토제가 필요할 정도로 물가 인상이 있었다. 밀 한 되 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은 물가고가 심각한 궁핍상을 말해준다.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에는 해를 끼치지 마라.”는 것은 일년생 곡식농사는 흉작이 들어도 다년생 과수농사는 그런대로 계속된다는 뜻이다. “땅의 사분의 일”만 파괴한다는 것은 종말에 있을 큰 환난에 대한 서곡으로 부분적 환난을 말한다.(8절) 다섯 째 봉인 단락에서는 하느님께 충실하게 믿음을 간직한 사람들이 받게 된 박해와 고통에 대한 그리고 하느님이 악인들을 처벌하시는 방법에 있어 이해되지 않는 처사에 대한 숨은 의미가 드러난다. “희고 긴 겉옷”은 순교자에게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 반면 신적 지연은 선택된 사람들의 수가 찰 때까지만 허락된 것이다. 여섯째 봉인에서는 역사 안에 직접 개입하시는 하느님 진노의 큰 날을 기술한다. 하느님의 개입을 일곱 장면(큰 지진이 일어나고, 해가 새까매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하고, 별들이 떨어지고, 하늘이 사라지고, 산들과 섬들이 제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없게 된다)으로 묘사하고, 그에 반응하는 인간 또한 일곱 부류(왕, 고관, 장군, 부자, 권력자, 노예, 자유인)로 설명함으로써 극적 효과를 주면서 공포를 유발한다. 상징적 숫자 7을 통해 인류 전체를 지칭하면서 어떠한 계층도 하느님의 개입을 면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여섯째 봉인에서 천체 변화 대목은 병행하면서 대조를 이루는 선택된 자들 보호 대목(7장)으로 이어진다. 요한의 시선은 악인들에 대한 명백한 승리, 선택된 자들을 위한 결정적 승리가 있을 “주님의 날”, 분노의 날이자 구원의 날, 공포의 날이자 환희의 날을 향해 있다.
*색깔의 상징
색깔 |
상징 |
해당 성경 구절 |
하얀색 |
신적 세계, 신성, 순결, 부활, 승리 |
1,14; 2,17; 3,4.5.18; 4,4; 6,11; 7,9.13; 14,14; 19,14; 6,2; 19,11; 20,11 |
검은색 |
불행, 비탄 |
6,5; 6,12 |
붉은 색 |
폭력, 피 흘림 |
6,4; 9,17; 12,3 |
푸르스름한 색 |
죽음 |
6,8 |
자주색/진홍색 |
방탕, 사치 |
17,4; 18,12.16 |
*십사만 사천 명: 묵시 7,1-8
요한은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바람이 불지 못하게 하고 있는 네 천사의 환시를 본다. 땅이 네 모퉁이를 가졌다는 것은 땅에 대한 유다인의 사고이고, 바람이 불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지상에 닥치는 환난을 멈추게 한다는 뜻이다. 이때 다른 한 천사가 동쪽에서 구원을 몰고 오면서 그 네 천사에게 그 어떤 환난도 닥치지 못하게 라고 명령한다. 144,000은 상징적 숫자다. 이스라엘 12지파를 표시하는 12와 민족들과 연관하여 충만을 나타내는 12와 하느님 영역에 속하는 완전수 1,000이 결합된 숫자다. 셀 수 없이 많은 백성이 하느님의 구원을 얻을 것임을 상징적으로 표시한다. 신약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들은 “하느님의 이스라엘”(갈라 6,16), “아브라함의 자손”(갈라 3,29), “속으로 유다인”(로마 2,29)이다. 또한 이들이 “하느님의 인장”으로 표시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께 속해 있는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의미이다. 요한은 이 거룩한 암호를 통해서 박해받고 쫓기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하느님의 소중한 백성이요 새 이스라엘의 지파들로서 현재의 시련을 겪고 난 다음에는 영원불변의 완성된 삶을 누리도록 되어 있음을 그들에게 확신시키고 있다.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숫자의 상징
1/4, 1/3 |
불완전한, 부분적인, 일시적인(8,7-12) |
반, 셋과 반 |
한정된 시간, 제한된 기간: 반 시간(8,1), 반 년(12,14), 사흘 반(11,9.11) |
하나 |
배타성, 우위성, 탁월성: 처음(1,17; 2,8; 22,13) |
셋 |
완전성, 충만함(4,8: “거룩하시다”의 반복 횟수) |
넷 |
보편성: 네 모퉁이(7,1; 20,8) |
여섯 |
불완전함: 육백육십육(13,18) |
일곱 |
충만함, 전체성, 완전함: 일곱 영(1,4), 일곱 교회(1,11.20), 일곱 황금 등잔대(1,12), 일곱 별(1,16), 일곱 횃불(4,5), 일곱 봉인(5,1;6,1), 일곱 천사(8,2;15,1), 일곱 나팔(8,2), 일곱 재앙(15,1), 일곱 대접(16,1) 등 |
열 |
완성: 열 개의 뿔(13,1) |
열둘 |
선택된 백성의 대표성, 새로운 백성의 연속성: 열두 개 별(12,1), 열두 성문, 열두 천사, 열두 지파, 열두 초석, 열두 사도 이름 등(21,12.14.21), 십사만 사천 명(7,4-8), 스물넷(4,4.10;5,8;11.16;19,4) |
천 |
다수: 수백만 수억만 천사들(5,11), 각 지파의 만 이천 명(7,4-8), 긴 시간, 확대된 기간: 천 년(20,2-7) |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 묵시 7,9-17
여기에서 땅과 하늘은 지상 전례와 천상 전례가 연결되는 장으로 나타나 있다. 우선 흰옷 입은 사람들이란 하느님의 자비로 용서받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흰색과 함께 야자나무(혹은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를 의미하며,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10절)라는 이들의 외침은 승리가 곧 구원임을 알려 준다. 그러자 모든 천사가 어좌 앞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느님께 최상의 경배와 찬미를 드리면서 분위기는 한층 고조된다. 이 때 원로 가운데 하나가 요한에게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에 대한 종말론적인 예언을 들려준다.(13-17절) 이 같은 비유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량을 통해 용서받고 구원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제 열두 지파처럼 이집트 종살이에서 풀려 나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서 있다.(15절) 하느님께서는 그들 위에 천막을 쳐서 그들을 가려 주시고(15절) 그들의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신다.(17절) ‘천막을 치다’의 그리스 말은 ‘스케노’로, ‘살다’ 또는 ‘머무르다.’라는 의미도 있다. 즉 하느님께서 그들 안에 거처하시며 그들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이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의 돌보심 아래 그들은 생명의 샘에서 주림도 목마름도 뜨거움도 격지 않을 것이다.(이사 49,10) 어린양에 대한 목자의 비유는 ‘착한 목자’(요한 10,11.14)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일곱 째 봉인과 일곱 나팔: 8,1-11,14
향의 연기로 상징화한 “성도들의 기도”를 하느님께 바치는 천사와 천상 제단에서 향로에 불을 가득 채워 지상에 던지는 천사의 이중 현시는 일곱 나팔의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타날 종말론적 환난에 직면할 영혼들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한다.
-8,1: 반 시간쯤의 침묵은 무서운 계시가 나타나기 전에 준비기간을 갖는, 심리학적으로 큰 일이 일어나기 전에 가만히 있는 상태를 가리키고, 또 한편 성도들의 기도가 하느님께 올려지는 동안의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준다. 예언 문학에서 침묵은 신현의 표징인(하바 2,20) 동시에 하느님이 구원 역사에 개입하심을 드러내는 표지다.(즈카 2,17) 즉, “야훼의 큰 날”(스바 1,7)이 왔음을 알리는 표징이다.
-8,2: 일곱 천사는 대천사로 알려진 “하느님 면전에 있는 천사들”(이사 63,9)로서 “우리엘, 라파엘, 라구엘, 미카엘, 사리엘, 가브리엘, 레미엘”(1에녹 20,7)이다. “나팔”은 종말론적 사건을 알리는 도구다. 또한 이는 하느님의 역동적인 현존, 그분이 가까이 오심을 알리는 상징이다.
-8,3: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은 지상의 성전에 상응하는 똑같은 성전이 하늘에 있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천상 성전에서는 번제 제단이 필요 없고 분향을 위한 금제단만 있다. 천상 성전의 지성소에 관해서는 히브 9장 참조할 것.
-8,4: 이 구절은 에제 8,11을 반향한다.
-8,5: 제단의 불을 땅에 던지는 행위는 거룹들 사이에서 춧불을 가져다가 도성 위에 뿌리는 즉각적 파괴행위를 묘사한 에제 10,2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천둥과 번개와 지진은 모두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이 인간 역사에 개입하신다는 상징들이다.
-8,6-12: 우주 대전환을 나타내는 처음 네 나팔은 하느님의 개입을 표현하는 구약성경(하느님이 직접 악을 쳐부수고 자기 백성을 구원한다는 탈출기, 이것을 종말론적 상황으로 명시하는 요엘서와 에제키엘서, 이것이 역사 안에 실현되는 다니엘서)의 사상을 전부 내포한다. 나팔이 울려 퍼질 때 마다 땅에 떨어지는 재난은 이집트의 재앙과 동일하다. “삼분의 일”은 한정된 부분을 나타내는 상징적 숫자이다. “쓴흰쑥” 사해의 물이 쓴 “쑥비” 때문에 마실 수 없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운석의 피해를 연상할 수도 있다.
-8,13: 독수리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천상적 존재이다.(바룩 2서 77,21-22) “불행하여라.”라는 저주가 세 번 반복되면서 나머지 세 나팔과 함께 연결된다. 세 나팔은 세 저주의 표징을 준비한다.(11,15-14,20)
-9,1-12: 이 단락에서는 하느님이 역사 안에 개입하심과 병행하여 악의 세력이 개입함을 상징적인 메뚜기 이야기를 통해 설명한다. 저자는 인간 역사 안에 들어온 이 악의 세력을 “파괴자”(히브리어로 아바똔, 그리스말로 아폴리온)라고 소개한다. 이 악의 세력은 이어지는 여섯째 나팔과 둘째 재난 단락에서 무시무시한 기병대 묘사로 발전한다.
-9,1: 여기서 별은 악마적인 힘이 아니라, 나락의 구렁을 열어 다섯째 재난의 길을 준비하는 임무를 가진 천상적 존재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지하로 내려가는 구렁”(아뷔쏘스: 심연)은 타락한 천사인 악마, 짐승, 거짓 예언자 그리고 사탄이 천년 동안 벌 받는 장소다.(9,11; 11,7; 17,8; 20,1.3) 반면 사탄과 그 추종자들의 결정적 처벌 장소는 “불과 유황 못”(20,10.14.15)이다.
-9,2-3: 탈출 19,18; 19,28의 연기를 상기하라.
-9,4-11: 이집트의 재앙을 연상시키는 이 메뚜기떼 묘사는 탈출기와 조금 다르다. 묵시록의 메뚜기떼는 초목을 해치지 말고 “이마에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들만 해치라.”는 명령을 받는다. 메뚜기들에게 주어진 기간은 다섯 달이다. 아마도 메뚜기는 유충기를 지나 죽음까지 5개월간 살기에, 한 세대의 메뚜기가 인간들을 괴롭힌다는 의미일 것이다. 악마적인 메뚜기 묘사는 많은 부분 요엘 2장에서 유래한다. 거대한 떼를 이루어 이동하는 메뚜기 떼는 푸른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큰 피해를 끼친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메뚜기들은 단순히 이러한 자연 현상을 말하지 않는다. 이들은 명백히 “지하”의 세력으로 지칭된다. 그 우두머리의 히브리 말 이름인 아바똔은 ‘멸망, 파괴’를 뜻한다. 그런데 이 말이 그리스 말로는 아폴리온, 곧 ‘파괴하는 자’로 옮겨진다.
-9,13: 첫째부터 다섯째 나팔 때까지는 직접 나팔소리와 함께 재앙이 세상에 떨어졌지만, 여섯째 나팔소리는 금제단의 네 모퉁이에서 나오고 그 소리가 재앙을 불러온다. 금제단에서 나오는 소리는 성도들이 바치는 열렬한 기도를 의미하므로 여기서 일어나는 여섯째 재앙은 성도들을 박해했거나 그리스도교를 부인한 데 대한 복수로서 기도의 결과다.
-9.14: 네 천사가 유프라테스 강에서 온다는 것은 아주 먼데서, 즉 낯선 이국 원수의 땅 아시리아와 바빌론에서 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에 있는 네 천사를 풀어주라는 것은 하느님이 징벌을 내리기 위해 과거에 하느님의 백성을 짓밟고, 노예로 삼고, 그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던 바로 그 땅에서 다시 “징벌의 천사들”을 불러들이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로마인들에게 가장 가공할 군대인 파르티아 기병대를 연상시킨다.
-9,16: 2억은 과장된 숫자로서, 이겨낼 수 없는 초인간적인 능력을 표현한다.(시편 68,18; 다니 7,10)
-9,18: 불, 연기, 유황은 무서운 기질을 나타내는 요소이다. 이런 악마적인 말의 모습은 욥기 41,11-13의 베헤못(거대한 바다 짐승)을 연상시킨다.
-9,20-21: 악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징벌의 결과는 이집트의 재앙과 비슷하게, 불신자들은 더욱 완고해진다는 것이다. 우상숭배를 그치지 않는다는 표현은 다니 5,23에서 유래한다.
-10,1-3: “큰 능력을 지닌 천사”는 가브리엘 천사이다. 히브리어 가브리엘과 ‘힘쎈’ 뜻의 기브로는 닮아 있다. 이 천사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사람의 아들’ 도는 하느님 자신과 비슷하다. 무엇보다 “큰 소리”와 “일곱 기둥”은 시편 29장에 나오는 “야훼의 소리”를 상기시킨다. 이 의문의 천사에 대한 묘사는 다니 10,5-6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무지개는 거룩한 존재나 물건을 둘러싼 빛, 곧 후광이다. “작은 두루마리”는 ‘봉인된 두루마리’(5,1-2)처럼 에제 2,8-3,3의 환시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봉인된 두루마리’와 달리 여기에서는 두루마리가 작은데, 이는 그 내용이 훨씬 더 적다는 뜻이다. 또 하느님을 울부짖는 사자로 비유하는 것은 예언 문학 전승에서 일반적이다.
-10,4-7: 봉인된 문서는 그 내용을 비밀로 해야 한다.(다니 12,4 참조) 또 하느님의 신비가 곧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며 장엄한 맹세를 하는 장면은 다니 12,7의 영향이 분명하다. “그분의 신비”는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게 해주셨고 지금 마지막 완성의 순간에 이르고 있는 구원의 경륜을 말한다.
-10,8-10: 두루마리를 먹는다는 것은 새로운 계시와 예언을 받고 그것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에제 2,8-10; 3,3) 두 가지 맛은 ‘말씀을 받는 것은 달지만 예언직을 수행하는 일은 쓰다.’, ‘구원을 예고하는 것은 수월하지만 시만을 예고하는 것은 힘들다.’. ‘선택을 예고하는 것은 달콤한 일이지만 박해를 예고하는 것은 쓰라린 일이다.’ 등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작은 두루마리의 내용을 확실히 알 수 없다. 저자는 두루마리를 먹고 천사들로부터 묵시록의 전형적 표현법으로 “백성, 민족, 언어, 임금”에 관해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계속 예언할 임무를 받는다. 아마 그 내용은 11장을 말할 것이다.
*두 증인: 11,1-19
11장은 묵시록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난해한 장으로 알려져 있다. 11장을 간단히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1-2절 성전 측량
·3-13절 두 증인 이야기, 두 증인의 파멸(3-6절), 두 증인의 죽음(7-10절), 두증인의 영광(11-13절)
·15-19절 일곱째 나팔과 영광스런 하늘의 모습
11장은 묵시록의 저술 연대를 가늠케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학자들은 묵시록을 90년대 작품으로 본다. 여기서 성전 측량 이야기가 나오는데,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70년에 완파되었다. 이런 성전을 어떻게 측량할 수 있겠는가? 일반적으로 11장은 묵시록이 기록되기 전에 열혈당(독립투사)이 예루살렘이 침공당하기 직전 상황에서 서로 격려하며 회람한 조그만 쪽지였으리라. 또한 저자는 이 구절을 쓸 때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마음의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고도 한다.(1코린 3,16 참조)
-11,1-2: “지팡이 같은 잣대”는 갈대 측량대(칼라모스)이다. 측량하라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을 거슬러 일어나는 이방민족의 두목인 ‘그리스도의 적’의 공경으로부터 신자들로 이루어진 “하느님의 성전”을 보호하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영적 의미의 성전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 하느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성전 바깥뜰을 재지 말라는 것은 영적으로 이방인들이 마지막 날에 당할 파멸을 말한다.
-11,3: 마흔 두 달은 다니 7,25에 언급된 “3년 반”에 해당되는 기간이다. 다니 8장에 기록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의 3년 반 동안 박해 이후 이 기간은 묵시문학에서 반그리스도 왕국의 기간으로 규정되는 온갖 박해의 상징이 되었다. “마흔두 달”이나 “3년 반”이나 “1260일”은 모두 완전수 7의 반으로 불완전을 가리키는 상징수이다. 즉, 모든 것이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이루어지며 언젠가는 끝나는 한정된 기간의 박해를 상징한다. 두 증인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두 올리브 나무와 두 등경에 비유되는 이들은 즈카리야에 의하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올 때 유다 공동체의 지도자인 여호수아와 즈루빠벨을 가리킨다.(즈카 4,3.11-14) 그러나 여기에서는 성령(19,10; 요한 15,26; 1요한 5,6)과 그 표출자인 예수의 제자들, 곧 신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들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그리스도를 알아들을 수 있으며 그분을 증언할 수 있다.
-10,4-6: 자루옷(사크)은 애곡하고 회개할 때 입는 옷이다.(이사 32,11) 자루옷은 증인들이 하는 회개의 설교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5절(2열왕 1,10.14; 예례 5,14), 6절(1열왕 17,1; 탈출 7,17, 1사무 4,8)
-10,7: 지하는 악의 세력이고, 짐승은 13장의 두 짐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13,1; 17,8; 다니 7,3.21.29)
-10,8-10: 소돔은 대표적인 방탕한 도시로, 이집트는 하느님의 백성을 증오하고 우상의 힘이 통치하는 곳으로 묘사된다. “땅의 주민들”은 회개하지 않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10,11-12: 두 증인이 죽고 사흘 반 만에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의 숨결에 의해 살아난다. 3년 반 동안 예언을 했고, 3일 반 동안 죽어서 수치를 당했다. 결국 예언하는 동안 수치를 당했다고 할 수 있다. 아마 이 구절은 에제 37,5-10의 “마른 뼈” 환시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묵시록 저자가 마른 뼈 환시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계되어 있음을 상기시킨다. 엘리야 승천기(2열왕 2,9-11)의 영향을 받은 두 증인의 승천은 예수님의 승천이 지닌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10,13-14: 사회의 모든 계층을 나타내는 상징수 7과 셀 수 없이 많음을 나타내는 상징수 1,000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믿음이 없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했음을 보여준다.
-10,15-19: 이 일곱째 나팔은 셋째 재난에 속하며, 이는 세 표징의 장을 열어준다. 즉, 여인(12,1), 용(12,3), 일곱 금대접을 든 일곱 천사(15,1)의 표징이다. 일곱째 나팔을 불자 승리자들이 부르는 영광송이 하늘에서 들려온다. 하느님 나라가 이미 성취된 것으로 노래하는 이 영광송은 일곱째 나팔을 불 때 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라던 천사의 말(10,7)을 상기시킨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던 주님”에 “앞으로도 계실 분”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일곱째 나팔과 더불어 하느님의 신비는 이미 완성되었다. 하느님의 오심은 이미 현재의 행위다. “계약의 궤”는 천상 궤를 본떠서 제작되었다.(탈출 25장 참조) 한편 유다인들의 믿음에 의하면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예루살렘이 침공당할 때에 예례미야가 느보산에 숨겨두었던 이 궤가 마지막 시기에 다시 나타나리라고 한다.(2마카 2,8; 2바룩 6,5-10 참조) 구약성경에서 계약의 궤는 백성 가운데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가시적 증거였다. 이곳에서 천상 “계약의 궤”가 나타나는 것은 이제 하느님이 승리한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안에 결정적으로 현존하심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 주제는 21-22장에서 더 발전된다.
*여인과 용: 12,1-18
여인은 그리스도를 탄생시킨 하느님 백성, 즉 교회를 상징한다. 구약성경에서는 백성을 여성으로 의인화시키는 경우가 많다.(이사 60,20; 60,7 참조) 예수님도 이런 의미로 여인의 산고를 최후의 만찬에서 말씀하셨다.(요한 16,20-22) 그러므로 제자들은 수난의 고통을 통해 이 새로운 인간, 곧 예수와 그분의 교회를 해산하는데 기여하게 된다. 이처럼 여인은 갈바리아의 비극을 통해 메시아를 해산하는 하느님 백성, 교회를 상징한다. 12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여인과 용(1-6절), 미카엘이 용을 이기다(7-12절), 용이 메시아의 어머니라는 여인을 박해하다(13-18절).
-12,1: 천상적 장식으로 단장된 이 여인은 한 아들을 낳았고, 그는 메시아로 이해된다. 5절에서 그는 시편 2,9의 메시아 예언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여인은 창세 3,15에 예언된 뱀(사탄)을 이길 후손을 낳는다. 여인은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낳는 하느님의 백성, 즉 교회이다. 한편 교부들은 이 여인을 마리아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의 모상으로서의 마리아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유다 전승에서 12별은 이스라엘 12지파를 나타낸다.(창세 37,9-11) 그러나 여기서는 교회를 건설하는 12사도를 말한다.
-12,3-4: 신화 속의 동물인 용은 구약성경에서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라합(이사 51,9), 레비아단(시편 74,13-14), 베헤못(욥 40,15-24) 등. 뿔이 열 개라는 것은 다니 7,7의 넷 째 짐승과 같고, 머리가 일곱이라는 것은 어린양의 일곱 뿔을 연상시킨다. 7은 완전수이고, 10은 일련의 번호를 매기는 일이 끝났음을 뜻하는 수이다. 그리고 뿔은 힘을 상징한다. 이 용은 막강한 권한과 권능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4절은 하느님의 거대한 적이 가진 오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묘사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로 상징되는 “작은 뿔”이 하늘에 닿기까지 자라서 별의 1/3을 땅에 떨어뜨린다.
-12,5-6: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다니 8,10) 그 아기는 묵시록에서 여러 번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 이제 창세 3,15에서 예고된 대립이 그 결정적 순간을 맞이한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하느님께로 그분의 어좌가 들어 올려졌습니다.)로 사탄의 패배가 이루어졌다. 한편 이스라엘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출되고 광야에서 기적적으로 살아갔듯이, 여인인 하느님 백성은 악의 세력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홀로 적그리스도의 기간(1,260일=3년 반) 동안 주님의 보호 속에 살 것이다. 이집트 탈출 이후 광야는 전능하신 하느님 보호의 상징이자 당신의 백성을 단련시키는 시련의 장소이다.
-12,7-12: 천상 전쟁에서 악의 세력이 패배하는 결과는 성경에 의하면 땅에서 이루어질 일의 전형이다. 예수님도 사탄의 패배를 말씀하셨다.(루카 10,18; 요한 12,31) 히브리어로 미카엘은 “누가 하느님과 같은가?”의 뜻이다. 미카엘 천사는 이방민족의 천사와 대적하여 이스라엘을 보호한다.(다니 10,21) 히브리어 사탄의 본래 의미는 “고발자”(욥 1,9-11; 2,4-5, 즈카 3,1-2 참조)이다. 칠십인역에서는 항상 ‘디아볼로스’라고 번역한다. 구약성경과 후기 유다문학에서 사탄은 하느님 면전에서 사람들을 고발하는 타락한 천사로 나타난다. “그 옛날의 뱀”은 원조를 유혹한 그 뱀이다.(창세 3,1-15) 11절 그리스도인들의 증언은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여 죽기까지 증언하신 것과 연관이 있다. 이는 순교자들의 증언과 같다.(요한 12,55 참조)
-12,13-18: 탈출기에서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독수리 날개”에 태워 사막으로 인도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탈출 19,4) 이는 모세의 노래(신명 32,11)에서도 나타난다. 15-16절은 탈출기 장면을 상기시킨다. 땅이 선택된 백성을 도와 마른 발로 바다를 건널 수 있게 했지만, 박해자들은 전부 삼켜버렸다. 17절에서 창세 3,15의 예언이 성취된다. 여인의 “후손”은 누구보다 먼저 그 첫아들인 메시아이다. 이 메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를 믿는 이들도 “여인의 나머지 후손들”이 된다. 바오로 사도도 그리스도를 이런 식으로, 곧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이”로 부른다.(로마 8,29)
*두 짐승: 13, 1-18
하느님의 계획을 거슬러 일어나는 사탄의 전쟁은 이미 하늘에서 예고했던 것이고(12,7-9), 이제 이 전쟁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인 로마제국에 의해 땅 위에서 이루어진다. 13장의 “두 짐승”은 용(악마)에게 숭배를 강요하는 정치적 세력과 그 예언자들을 의미한다. 첫째 짐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네로의 환생”이라는 속설을 이해해야 한다. 즉, 네로가 자살 한 뒤 사람들은 그가 죽지 않고 동방의 파르티아로 도망갔으며 언젠가 다시 군대를 끌고 돌아와 집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노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반그리스도로서 네로의 환생설과 가사설(假死設), 전생의 왕권 탈환설 등을 신봉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13,1-2: 다니엘서의 환시(다니 7,2-8)에서는 짐승들이 여러 제국을 상징하는데(사자=바빌론, 곰=메디아, 표범=페르시아, 쇠 이빨 가진 짐승=알렉산더 대왕. 그리스 제국), 여기에서는 교회를 박해하는 로마 제국의 권력을 가리킨다. 이 권력은 하느님만이 지니실 수 있는 권능과 칭호를 자기도 가진 양 교만을 부린다. 그래서 이 짐승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을 달고 있다고 말한다. 이 짐승 또한 17,3.7-12에서 서술되는 짐승과 비슷하다. 일곱 머리와 열 뿔 설명. 용이 자기 힘과 왕위와 큰 권세를 부여한다는 말은 거짓 예언자나 거짓 메시아가 사탄의 힘을 빌려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해 기적을 행한다는 의미이다.(마태 24,24; 2테살 2,9-10 참조)
-13,3-4: 죽도록 난도질당했다가 놀랍게도 다시 생명을 얻은 일곱 머리 가운데 하나는 일곱 왕 가운데 하나일 것이며, 아마도 네로를 지칭할 것이다. 거의 죽게 된 머리의 기적적 치유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연상시키며, 짐승을 적그리스도로 부각시킨다.
-13,11-18: 둘째 짐승의 상징을 통해(16,13; 19,20; 20,10)에서 거짓 예언자와 동일시 함) 황제숭배를 제국의 모든 속주에 전파하고 보호하려는 이방 종교적 권위의 활동을 묘사한다. 어린양처럼 두 개의 뿔을 가지고 용처럼 말한다는 것은 거짓 예언자들을 말하는 것 같다. “거짓 예언자들을 경계하십시오. 양의 옷을 입고 오지만 속은 약탈하는 이리들입니다.”(마태 7,15) 그리고 이 짐승은 표징도 일으킨다. 이는 이미 예수님께서 경고하셨다.(마르 13,22) 전체적으로 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내용이다. 15절의 숨을 불어 넣어 그 짐승의 상이 말을 하기도 한다는 말은 옛날에는 여러 가지 속임수를 동원하여 신상이 직접 말하는 것처럼, 곧 사람들에게 신탁을 내리는 것처럼 조작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도 상거래를 위한 이마에 표는 히브리/아람 말과 그리스 말에서는 철자 하나하나가 특정한 수가 배당되어 있었고, 그래서 이름 같은 것을 숫자만 가지고서도 표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황제 숭배가 성행하던 지방에서는 그것을 거부할 경우에 그 자체로 사회에서 소외를 당하고 추방당했다. 짐승의 낙인은 짐승의 종이라는 말이다. 당시 로마 제국에 속한 모든 사람이 자기네 종교 예배에 앞서 황제의 신상 앞에 향을 피우고 그 증명서를 발급받았다. 그래서 여기서 짐승의 인장을 찍었다는 것은 또한 황제숭배 증서를 발급 받았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렇다면 황제 숭배자요 그리스도 배반자라는 표시다. 666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당시 독자는 금방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수세기 동안 많은 학자들이 다양하게 이 숫자의 해석을 시도했다. 대부분 학자들은 역사상 구체적 인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많은 해석 가운데 주류는 “네로 황제”라는 것이다. 그 히브리어 자음의 숫자 가치가 합해서 666이기 때문이다. 한편 일부 학자들은 666을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라고 본다. 완전수 7에서 하나가 모자란 것이 셋이나 모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666이 상징하는 인물을 알아보려고 너무 집착하는 것은 성경의 본질을 흐리게 만들 수 있다. 한 때는 “모하메드”라는 이름을 짐승의 숫자에 맞추기 위해 “마오메티스”로 바꾸기도 했다. 또 때로는 이슬람교도, 사라센인, 터키인들을 이 짐승과 동일시하기도 했다. 한편 종교 개혁 이후 많은 사람이 교황을 666이라 비난하기도 했다. 반대로 루터교도 666이가는 숫자 값이 나온다. 더러는 알파벳의 숫자를 임의로 만들어 자기네 적들에게 적용시켰다. 가령 케플러는 독일어 알파벳의 시작을 100을 삼아 A=100, B=101, C=102 등으로 계산함으로써 Hitler=666이라고 했다. 묵시록이 쓰일 당시에는 666은 구체적 실존 인물을 뜻했지만 이제는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 인물이건 사물이건 묵시록의 상황과 같게 만드는,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떼어 놓는 그 누구, 그 무엇이라도 모두 666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린양과 그의 백성: 14,1-20
어린양의 출현으로 시작되는 14장의 환시는 완전히 실현된 구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 종말 때의 구원상황을 미리 보여 준다 하겠다. 1-5절에서는 시온산 위에 있는 어린양과 그를 따르는 144,000명을 소개하는데, 이들은 우상 숭배인 매춘을 거부한, 짐승의 이름이 아니라 어린양의 이름을 지닌 숫총각들이다.
-14,1: 구원은 어린양, 곧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시온 산은 명백히 천상의 시온(=예루살렘) 산으로 상징적 의미가 있다.
-14,2-3: 찬미가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단지 구원된 144,000명 외에는 아무도 이 찬미가를 배울 수 없다.
-14,4-5: 숫총각의 뜻은 우상숭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신앙에 완전히 일치한 사람을 말한다. 또한 이들의 선언은 이들이 그리스도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 그분의 수난과 부활에 함께 함을 의미한다. “거짓”은 곧 우상숭배이다.
-14,6-13: 세 천사가 심판을 예고한다. 첫째 천사는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하느님께 경배할 것을 가르치고, 둘째 천사는 멸망에 대해 가르치며, 셋째 천사는 배교자들이 당할 일을 보여주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끝까지 믿고 인내할 것을 가르친다. 이어지는 추수와 포도수확은 “짐승”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이방 도시 바빌론(로마)의 멸망을 미리 보여준다.
-14,8-10: 우상 숭배를 만취하는 방탕에 비유한다. 유배 이래 바빌론은 하느님과 그분 백성에 대립되는 제국으로 묘사되며 저주만이 주어진다. 여기서는 바빌론의 타락을 방탕한 주정으로 묘사한다. 이방인 축제를 암시하면서 우상숭배의 윤리적 무질서를 상기시킨다.
-14,11: 불과 유황은 불신자 징벌의 전통적 표상이다. 이 표상은 가끔 불이 타오르는 게헨나와 관련되는데, 게헨나에서 불의 표상이 유래되는 것 같다.(마태 18,8-9) 히브리 말로 벤 힌놈이라고 하는 게헨나는 예루살렘 남서쪽으로 에워싼 계곡인데, 무엇보다도 이 골짜기를 부정한 곳으로 여긴다.(2열왕 23,10; 예레 7,31) 유배 이후 부정한 시체와 쓰레기를 소각하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총체적으로 이곳은 악인들이 벌 받는 곳으로 이해된다.
-14,12: 낮에도 밤에도 안식을 얻지 못한다는 말은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지 못함을 뜻 한다.(이사 34,9-10)
-14,14-20: 구름은 신적 영광이고, 낫은 심판자로서의 메시아이다. “추수”와 “포도 수확”은 여호사밧 골짜기에 하느님의 심판이 임박했다고 선언하는 요엘 4,13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추수는 의인들을 거두는 것보다 불신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최후 심판을 가리킨다. “도성”은 예루살렘이다. 포도주 확이 도성 밖에 있음은 본래 속죄 제물을 “진지 밖에서” 태우게 되어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레위 16,27) 유다 전승에 따르면 이방 민족을 멸하는 하느님의 심판은 도성 근처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묘사는 20장에 다시 나온다. 1600스타디온은 300Km도 넘는 거리로 과장된 상징수이다. 1600=4 ×4 ×100. 4는 “사방” “세상”을 가리키며, 결국 피가 온 세상을 덮었다는 말이다.
*마지막 일곱 재앙의 예고: 15,1-8
12장에서 시작한 세 표징의 장은 15,1로 끝난다. 이곳의 셋째 표징은 위의 일곱째 봉인 혹은 나팔처럼 아무 내용이 없고 다만 뒤따라오는 일곱 대접의 장을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제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가 나타나 마지막 재앙이 있게 되며, 그다음부터 묵시록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 천상 예루살렘의 영광을 보면서 그리스도께서 빨리 오시기를 고대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재앙”은 직역하면 “매질” 또는 “때림”이다. “불이 섞인 유리바다”는 4,6에서 이미 하느님의 옥좌 앞에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있음을 보았으나, 여기서는 따라 나오는 “모세의 노래”로 보아 선택된 백성이 건넜던 홍해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모든 장면이 새로운 모세인 어린양이 선택된 당신 백성을 “수정 바다”를 거쳐 약속된 땅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이끄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모세의 노래”(탈출 15장)와 “어린양의 노래”는 하느님의 구원업적을 칭송하는 노래로서 동의어 반복이라 하겠다. 천상 성전을 묵시록에서는 “증언의 천막 성전”이라 한다. 원래 “증거의 장막”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다음 그 “증거의 궤”를 모셔 두기 위해 하느님 친히 분부하신 성전의 효시다.(탈출 26장;40장 참조) 이 “증거의 장막”도 “계약의 궤”와 마찬가지로 지상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며, 그 원형은 하늘에 있다. 따라서 지상 “증거의 천막” 원형인 천상 “증언의 천막 성전”이 열렸다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들에게 약속하신 구원이 가까워졌음을 말해준다. “빛나는 옷과 금띠”는 제관과 왕의 옷차림이다. 성전에 가득 찬 연기는 하느님의 현존과 충만하고 엄위한 영광을 상징한다.(탈출 10,4; 이사 6,4) 재앙이 끝나기 전까지 아무도 그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은 구름과 하느님의 영광이 가득 찬 만남의 장막에 들어갈 수 없었던 모세에서 유래한다.(탈출 40,35) 하느님의 분노가 담긴 일곱 대접이라는 표상은 성경에 자주 나타난다.(시편 75,9; 이사 51,17 참조)
*하느님의 진노가 담긴 일곱 대접:16,1-21
요한 묵시록 |
표징 |
탈출기 |
16,2: 첫째 대접 |
종기 |
9,8-12: 여섯째 재앙 |
16,3-7: 둘째·셋째 대접 |
물이 피로 변함 |
7,14-25: 첫째 재앙 |
16,8-9: 넷째 대접 |
뜨거운 열 |
|
16,10-11: 다섯째 대접 |
어둠과 괴로움 |
10,21-29: 아홉째 재앙 |
16,12-16: 여섯째 대접 |
개구리 |
7,26-8,11: 둘째 재앙 |
16,17-21: 일곱째 대접 |
(번개, 천둥, 지진) 우박 |
9,13-35: 일곱째 재앙 |
-16,10: “짐승의 왕좌”는 교회를 박해하는 로마제국 수도 로마시를 가리킨다.
-16,12: “해 돋는 쪽의 임금들”은 바빌론으로 상징되는 로마를 파괴하기 위해 하느님이 불러들인 이방 민족들을 말한다. 실제로 로마제국의 동쪽 끝 경계인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의 파르티아인들은(9,14참조) 강이 마름으로써 침략할 수 있었다. 로마의 파괴에 대해서는 17,16에 나온다.
-16,13-14: 개구리는 재앙과 관련이 있으며 더러운 짐승으로 여겨진다. 더러운 영은 곧 다음 절의 마귀들의 영이다. “용”은 사탄이고, “짐승”은 로마제국 또는 로마 황제이며, 거짓 예언자는 황제숭배를 유도하는 자들로서 13,13-14의 짐승이다. 이 셋은 성부, 성자, 성령의 상대역인 악의 삼위일체이다. 용은 성부의, 짐승은 성자의, 거짓 예언자는 성령의 상대자로 나타난다.
-16,16; “하르마게돈”은 하느님을 반대하는 산, 복음을 박해하는 로마에서 생긴 우상과 죄의 산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단어는 구약의 ‘므기또’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카르멜산 동쪽 에스델론 평원의 서부 지역인 므기또는 수 많은 왕들이 죽어간 전쟁터로 유명했다.(판관 4장; 2열왕 9,27; 23,29) 히브리어로 하르마게돈은 “므기또의 산”이란 뜻이다. “산”이라고 한 것은 찬미가를 부르기 위해 또 다른 무리가 모인 어린양의 산(14,1-5)과 대조를 이룬다.
-16,19-21: “큰 도성”은 “일곱 산”의 도시(17,9), “세상 임금들을 다스리는 왕권을 가진 큰 도성”(17,18)인 로마를 가리킨다. “대바빌론”은 로마제국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다. 뒤따르는 재앙들은 하느님이 인간 역사에 개입하심을 표현한다. 우박은 이집트의 일곱째 재앙을 상기시킨다. 1달란트는 약 40Kg.
*대탕녀 바빌론에게 내릴 심판: 17,1-18
17장은 “창녀”로 불리는 한 여인에 대한 단죄이다. 주홍과 진홍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몸단장을 하고서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진홍색 짐승을 탄 “창녀”의 이마에 “대바빌론”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로마를 상징한다. 로마제국의 권세를 “짐승”으로, 로마시를 “창녀”로 상징하여 말하는 것은 아마도 “네로 재생설”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네로는 죽지 않았고 언젠가 파르티아인들을 이끌고 동쪽에서 로마를 파멸시키러 오리라고 했다. 이 장에서는 과연 그 짐승(네로)이 그 창녀(로마)를 파멸시킨다.
-17,2: 큰 창녀는 전형적인 사탄의 도시 로마를 말한다. 큰물 곁에 앉아 있는 대탕녀를 바빌론이라 했다. 바빌론은 우상숭배의 악의 도시를 상징한다. 사실 바빌론은 바빌론 강가에 형성된 도시이다.
-17,4: 자주색은 귀족이나 임금이 즐겨 입는 옷 색깔로서 신분을 드러내고, 진홍색은 신분과 함께 특히 부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17,5: 로마법에 의하면 창녀들은 자기 이름을 이마에 끈으로 묶고 다녀야 했다고 한다. 신비는 곧 비밀스러운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17,6: 네로나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로마에서 일어난 대박해를 암시한다.
-17,8: 하느님은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이시지만(1,4.8;4,8), 하느님을 대적하는 “짐승”은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이미 없다. 물론 그것이 지금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천사는 그 짐승에게 멸망을 예고하신 하느님의 심판으로 그것이 이미 파멸하였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악인들은 그 짐승을 다시 볼 것이다. 이는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이 되살아남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17,9-14: “일곱 머리”는 “일곱 산”이라고 하는데, 실제 로마는 일곱 언덕 위에 세워졌다. “일곱 왕”은 의심 없이 로마제국의 황제들이다. “다섯은 이미 넘어졌다.”하여 과거의 왕들이고, 여섯 째 왕은 살아 있다 하니 현재의 왕이며, 반면 일곱째 왕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의 치세는 짧다고 한다. 그리고 일곱 왕 중 하나가 “전에 있다가 지금은 없는 그 짐승”이라고 하는데 대체 누구일까? 현대 성경학자들은 첫째 왕을 처음 황제 칭호를 받은 아우구스투스(기원전 27-기원후 14년)에 시작하여 티베리우스(14-37년), 칼리굴라(37-41년), 클라우디우스(41-54년), 네로(54-68)까지가 과거 다섯 임금이고, 베스파시아누스(69-79년)가 여섯 째 왕, 티투스(79-81년)가 일곱 째 왕, 도미티아누스(81-96년)가 여덟 번째 왕이다. 네르바(96-98년)는 아마 오더라도 잠시밖에 머물러 있지 못하는 왕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요한의 환시는 베스파시아누스 때에 있었던 것 같지만, 실제로 묵시록은 도미티아누스 때에 쓰여졌다. 아마도 박해받는 교회들에게 비밀스럽게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고, 치세 연대를 거슬러 올라가 예언 형태로 현 로마의 상태를 묘사했을 것이다. 한편 일부 성경학자들은 7 상징수를 언급하며 일곱 왕을 하느님 나라의 적들인 모든 나라를 상징한다고 보기도 한다. “열 임금”은 로마 속국의 왕들일 것이다.
-17,16-17: 로마 속국의 왕들이 짐승(네로)과 더불어 자신도 모르는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창녀(로마)를 파괴하는 데 한 몫 하게 된다. “불에 태워 버릴 것이다.”는 64년 네로에 의해 일어난 로마의 대화재 사건을 상기시킨다.
*바빌론의 패망: 18,1-24
18장은 대바빌론의 멸망을 장엄하게 묘사한다. 온갖 더러운 새들의 소굴이며 파멸의 원인으로 대바빌론을 보는 저자는 예언의 서곡으로 이장을 연다.(2-3절) 이어 열심한 신자들에게 도시에서 떠나기를 권하며, 하느님의 심판을 전달할 천사들에게는 신자들의 재난을 오히려 갑절로 갚아주도록 명한다.(4-8절) 그다음 왕들과 장사꾼들과 뱃사람들의 탄식이 나오고(9-19절), 신적 징벌의 완성을 기리는 노래와 찬사의 말로 끝맺는다.(20-21절) 18장은 구약에서 소재를 취하되 모두 자신의 신학적 구조에 맞추어 재해석한다. 에제 26-27;36장과 이사 23장에서 취한 소재가 많다. 특히 바빌론의 멸망은 에제 26-27장의 “티로의 멸망” 기사와 흡사하다.
-18,7: 바빌론의 자만심에 대한 이 구절은 이사 47,7-8을 인용한 것이다.
-18,8: 이사 47,9; 47,14 인용.
-18,12-13: 품목표 중에 인간이 제일 싸다.
-18,20-24: 로마가 맞을 최후의 비극. 전반부는 예레 51,63-64와 비슷하고 후반부는 예레 25,10과 같다. 로마는 사치에 취하여 물질만으로 기쁨을 찾았고 동시에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징벌을 받게 된다.(24절) 즉, 로마에서 박해가 시작되었고 많은 성도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심판 날이 다가왔다. 온 거리가 적막해지고 모든 풍요함과 웅장함이 이제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밝은 불빛이 어두워지고 모든 기쁨이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 없이 문명을 쌓아 올린 도시의 마지막 운명이다. “맷돌처럼 큰 돌을 들어 바다에 던지는” 행위는 바빌론의 운명을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이다. 이는 예레 51,63-64을 반향한다. 예레미야가 말한 바빌론이 묵시록에서 로마로 탈바꿈한 것이다. 22-24절의 황량한 바빌론(로마) 모습은 황폐한 유다를 보며 읊은 예레미야(25,10)의 애가를 상기시킨다. 또 예루살렘을 “피의 도시”로 부르는 것은 에제 24,6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질책을 반향하는 것 같다.(마태 23,37; 23,35 참조)
*결론: 19,1-22,5
①할렐루야 승리가: 19,1-10
이 승리가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천사들의 찬가, 24 원로와 4 생물의 찬가, 성도들과 순교자들의 찬가. 히브리어 할렐루야는 ‘하느님을 찬양하여라.’는 뜻으로 신약성경에서는 유일하게 묵시록 19장에서만 나온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21장에서 실현될 것이다. “혼인”의 비유는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과 선택된 백성을 잇는 특별한 사랑의 고리로 표현된다. 이것은 여기서는 그리스도께 그리고 새로운 예루살렘인 교회에 적용된다. 9절의 행복선언은 루카 14,15을 상기시킨다. 10절에 나오는 천사의 반응은 사도 10,25-26에 나오는 백부장이 엎드려 절하자 베드로가 말리는 것과 동일한 반응이다. 초대교회 신자 중에는 실제는 천사숭배의 오류에 빠진 자들이 있었다.
②흰말을 타신 분: 19,11-21
백마는 승리의 상징이다. 기사는 그리스도이시다. 12절의 “알 수 없는 이름”은 초월성과 그분의 신성을 암시하고, 13절의 “하느님의 말씀”은 종말론적 심판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16절의 “왕들의 왕, 주님(군주)들의 주님”에서 그분의 주권이 명시된다. “피에 젖은 옷”은 구세주의 참혹한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반역자들의 피가 뿌려진 옷을 입고 돌아오시는 전사로 묘사한 것이다.(이사 63,1-6 참조) 입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칼”은 적들을 치시고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시체가 나뒹구는 전쟁터에 새들을 불러 모으는 장면은 마곡에 대한 에제 39장의 종말론적 예언을 상기시킨다. 이제 마지막 결전이 벌어진다. 이미 16,14-16에서 온 세상의 왕들이 전능하신 하느님의 큰 날에 일어날 전쟁을 위해 “하르마게돈”에 집결하기 시작했다고 이 마지막 결전에 대해 암시한 바 있다.
*천 년 통치(천년왕국): 20,1-15
이제 종말론적 심판의 막바지에 이른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동시에 그때까지 큰 박해로 살해당했던 순교자들이 모두 죽음에서 일어나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게 된다. 그 나라는 천 년 동안 계속될 것이다. 그 후 악마는 잠시 놓여질 것이고 최후의 전쟁이 있은 다음, 모든 사람의 부활이 있고, 악마는 결국 패배하여 그 추종자들과 함께 불 못 속에 던져질 것이다. 이른바 천년왕국설은 그리스도교 배경이 아니라 메시아 시대에 대한 유다교적 배경에서 생겨난 것으로 본다. 유다 묵시문학 저서를 비롯한 유다 문헌들에는 메시아의 통치 기간을 각각 40년·100년·400년·600년·1000년·2000년·7000년 등으로 말한다. 이 기간이 끝나면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고, 이어 “새 하늘 새 땅”이 조성되어 영원이 지속될 것이다. 5-6절의 “첫째 부활”은 공심판 후 이뤄질 육신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교자들의 영이 죽음과 사심판 다음에 즉시 천상 복락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둘째 죽음”은 사람이 죽은 뒤 심판을 받고 영벌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천 년 통치는 하느님 원수의 멸망과 함께 마지막 심판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이는 “시간의 끝”에 따라올 교회의 영광스러운 국면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세상 마지막 날에 부활을 통해 완전한 찬미를 기대하면서, 이제부터 복된 사람들이 고대하던 영광에 관한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묵시록에서 복된 사람들의 참된 행복이란 그리스도의 천상적 사제직에 동참하는 것이다.(6절) 구약성경은 르우벤 지파에 속하는 “곡”(1역대 5,4)과 야벳의 아들인 “마곡”(창세 10,2)을 알고 있다. 그리고 에제 38-39장에서는 재건된 이스라엘을 거슬러 마지막 공격을 감행하는 마곡의 왕 곡에 대해 말한다. 유다 전설에 따르면 메시아 시대를 전후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이방 민족들의 이름으로 곡과 마곡이 꼽힌다. 이들은 “땅 사방”에서 온다. 그러나 하느님은 기적적 개입으로 이방 세계 마지막 적개심의 상징인 이들의 연합을 쳐부술 것이다. 한편 “죽음과 저승”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거슬러 일어나는 반대 세력을 의인화한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21,1-8
구약성경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은 무엇보다 메시아에 의해 선택된 백성의 재건과 개혁을 의미했다.(이사 65,17; 66,22 참조) 그러나 종말론적인 배경에서는 아마도 죄와 죽음의 무대인 이 세상에 대한 근본적 개혁의 의미로서 “새로운 창조”을 뜻할 것이다. 새 하늘 새 땅이 창조되면 슬픔은 잊혀지고, 죄는 없어지고, 어둠을 사라질 것이며, 시간은 영원으로 바뀔 것이다. 바다도 없어졌다고 했는데, 고대 우주관에 의하면 바다는 혼돈이, 암흑의 권세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새로운 창조에서는 이러한 악의 자리가 없다. 또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이란 구약성경에 의하면 종말론적 예루살렘의 실현이요(이사 60; 62장; 65,18-25참조),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들 사이에서 하느님 현존의 표징이었던 천상 하느님 현존의 원형이 드러나는 것이다.(11,19;탈출 25장 참조) 여기서 “거룩한 도성”은 재림 때의 이상적이고 영광스런 교회를 표상한다. 교회는 거룩한 백성이 모이는 장소라는 의미에서도 예루살렘으로 불릴 수 있다. “시작이요 마침이다” 여기서 시작은 어떤 첫 시점뿐 아니라 모든 것의 원천이고 기원이라는 말이다. 또 마침은 어떤 끝 시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의 목표와 완성을 의미한다. 즉, 하느님이 모든 것의 기원, 근원, 원천이요 완성, 목표시라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 21,9-27
“새 예루살렘” 묘사는 17-18장의 “바빌론-대탕녀” 묘사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바빌론 환시 때 저자는 크고 높은 산 위로 이끌려 간다.(21,10) 광야는 더러운 영들과 교감하는 전통적 불모지이지만, 높은 산은 하느님과 만나는 상징적 지점으로써 시나이산에서 시온산까지 모든 위대한 성경적 산들을 함축한다.
-21,10: 에제 40,2 참조
-21,11: 거룩한 도성에서 나오는 빛이 4,3;21,18.19에서처럼 벽옥에 비유된다. 구약성경에서 벽옥은 대사제의 가슴받이(탈출 28,20)와 티로 왕의 장식(에제 28,13)을 묘사할 때 거명된다. 성경에서 푸른색은 나뭇잎이나 풀들의 색이라는 점에서 활기찬 모습, 건강한 모습, 번영과 생명을 지칭한다.
-21,13: 천상 예루살렘은 성벽, 성문, 주춧돌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이사 54장에서 구조를 취하되 동시에 에제 48장의 자료들을 재작업하여 자신의 표현을 한다. “열두 성문”은 천상 예루살렘에 재건된 옛 이스라엘의 상징이다. “열두 천사”는 천상 예루살렘을 지키는 수호자들이며, 이 성의 거룩함을 표현하고 있다.(이사 62,6 참조)
-21,14: “새 이스라엘”의 초석은 어린양의 열두 사도이다.
-21,15: 에제 40,3 참조
-21,16: 고대 사회에서 정사각형을 가장 완벽한 형태로 생각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바빌론도 길이와 너비가 모두 120스타디온으로 네모 반듯했다고 한다. 한 스타디온이 약 185~200m이므로 12,000스타디온은 약 2,400Km. 그러나 과장된 숫자로 완벽을 상징한다. 12,000=12×1000. 길이·너비·높이가 모두 같으니 새 예루살렘 도성은 거대한 정육면체이다. 예루살렘의 지성소가 정육면체라는(1열왕 6,20 참조)데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새 예루살렘이 완벽하게 생겼다는 상징이다.
-21,17: 한 페키스가 약 50cm이니 약 70m 높이다. 그러나 144=12×12도 완전함을 뜻하는 상징수이다.
-21,18-21: 값진 보석으로 장식한 도시는 구약성경에 자주 나오며, 메시아 시대의 예루살렘을 가리킨다.(토비 13,16-17; 이사 54,11-12 참조) 열두 보석은 이스라엘 대제관들의 가슴받이에 박힌 보석들과 상응한다.(탈출 28,17-20)
-21,22-24: 천상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는 영성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즉, 예루살렘 성전 안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은 하느님의 영적 성전이며 살아 있는 돌로 된 성전인 새로운 백성 사이의 신적 거주로 묘사된다.(에페 2,21; 1베드 2,5 참조) 또 마지막으로는 하느님 당신이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바꾸어 묘사된다.(21,22) 천상 예루살렘에는 거룩한 현존을 위한 자리가 따로 없다. 이제 주님과의 통교가 직접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21,25-27: 모든 백성이 영성적 일치의 장소로 변한 예루살렘으로 거대한 종말론적 순례를 한다는 사상은 이사 60,3.11에서 유래한다. “바다”와 마찬가지로, 악의 근거지인 “어둠”도 새로운 창조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무리: 22,1-21
①22,1-5은 천상 예루살렘에 대한 환시를 마무리 지으면서 동시에 지금까지의 묵시록 예언 부분을 마감하는 구절이다. 21장이 새 예루살렘의 외적 묘사였다면 이 단락은 그 내적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저자는 어린양과 하느님 옥좌의 현시에 주의를 기울인다. 옥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강은 낙원의 평화를 하느님과 인간들의 깨지지 않는 확고한 관계로 다시 회복시킬 것이다.
-21,1: 신비스런 열매를 맺는 생명의 나무가 자라는 강의 표상은 창세 2장을 상기시킨다. “새로운 창조”와 “지상 낙원”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 부분에서 저자는 “성전 동쪽 문턱에서 솟아나오는 물” 이야기를 전하는 에제 47,1-12을 재작업하며 따라가는 듯하다. 에제키엘이 비록 그 강을 “생명수의 강”이라고 직접 묘사하지는 않지만 내용상 같은 의미이다.(에제 47,9) 그러나 에제키엘은 이 강물이 성전에서 흘러나온다고 묘사하는 반면, 묵시록 저자는 하느님과 어린양이 성전이므로(21,22) 그분의 옥좌에서 새 예루살렘이 흘러나온다고 한다. 즉, 생명은 하느님과 어린양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22,2: 에제키엘은 “그 열매는 양식이 되고 그 잎은 약이 된다.”(에제 47,7. 12)이라고 전하지만, 묵시록 저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창세 2장 에덴동산의 생명나무까지 연결시킨다. 아담의 범죄 후 인류는 생명나무는 커녕 아예 에덴동산 자체에도 접근할 수 없었고, 오직 하느님의 저주만 무겁도록 짊어졌다. 이제 이 동산 접근금지 선고가 무효화된다. 이렇게 해서 신·구약성경 전체의 맨 끝 장(묵시 21-22장)들이 맨 첫 장들(창세 1-3장)과 대조를 이룬다. 즉, 성경 첫 책에서 “잃었던 낙원”이 마지막 책에서 “되찾은 낙원”으로 변한다.
-22,4: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뵙다.”란 하느님 면전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말이다.
-22,5: 탈출 28,36-38에 의하면 대제관의 이마에는 “주님께 몸 바친 성직자”란 패를 붙였다고 한다. 저자는 하느님의 도성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구약의 대제관처럼 이마에 하느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기에 모두 제관 자격으로 하느님을 섬길 것이라고 말한다. 이마에 하느님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은 선택된 사람들이 하느님께 완전히 속한다는 표지다.
②그리스도의 재림: 22,6-21
맺음말은 예언 부분에 나왔던 여러 가지 훈계들일 다시 한번 되풀이된다. 요한의 묵시록은 비참과 영광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끝난다. 무서운 박해 속에서도 저자가 희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빨리 이 지상에 내려오시는 것이다. 비록 예수님께서 금방 오시지는 않았지만, 당신 영을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시고 바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빨리 임하도록 우리 마음을 준비시키고 계시다. 그래서 저자는 하느님의 은총,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모든 사람에게 축원하는 마지막 인사로 끝을 맺는다.
-22,7: 행복선언은 1,3; 2,16; 3,11; 22,7.14.20 나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22,9: 19,9의 실수를 또 범한다.
-22,11: 사람들의 행동이 착하든지 악하든지 하느님의 말씀은 꼭 이루어지라는 말이다.(다니 12,10)
-22,14: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빠는 이”는 그리스도의 피로 자기 예복을 빠는 사람들과 연결된다.(7,14) 곧, 인간의 정화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효력으로 주어지는 은총이다.
-22,15: “개”는 이교도뿐만 아니라 배교자와 이단자도 포함된다. “밖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마태 8,12처럼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울며 이를 갈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22,17: “성령”이 세상에서 고통받으며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인 “신부”와 함께 재림을 청원 기도한다.
-22,18-19: 저자는 성령에 의해 보증된 이 예언의 책 내용을 손상하려는 자는 누구나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신명 4,2 참조)
-22,20-21: 묵시록의 메시지는 “그렇다. 내가 곧 간다.”로 요약될 수 있다. 이 약속에 교회는 전례적 기도로 응답한다. “오십시오, 주 예수님!” 아람어 ‘마라나타’의 음역이다. 이는 종말론적 희망을 표현하는 초대교회의 전례 용어였다.(1코린 16,22; 디다케 10,6 참조) 묵시문학 작품에서 예외적인 이 마지막 축복 인사는 이 책이 모든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과 전례 차원에서 공적으로 읽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와같이 새로운 창조 이야기는 요한 묵시록 전체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압축하고 있는 것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예언이나 저주의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 사상이다. 악의 세력이 마지막 날에 결국 파멸하리라는 것은 여타의 묵시문학들과 공통된 관점이지만, 요한 묵시록은 이 승리의 근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는다. 새로운 창조란 결국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 그로부터 샘솟는 위로와 희망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말세 현상과 관련하여 파괴적인 종말론으로 해석하는 이단은 피해야 한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 같은 공상 영화 혹은 판타지 작품으로 이해해서도 안 된다. 또 자의적인 해석은 자칫 자신의 적대 세력을 악으로 규정할 위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박해 상황 속에서 희망과 용기를 가지는 교회의 순수성을 읽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