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요한복음 제2-2강의: 요한 7,1-8,11

 

*들어가면서

앞으로 우리가 보게 될 7-10장까지는 예수님 자신이 초막절을 완성하는 분임을 제시하신다. 그리고 초막절 축제 기간 중에 예수님과 유다 지도자들 사이의 대립과 논쟁을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초막절이란 무엇인가? 초막절은 유다인들의 3대 축제 가운데 하나로써 보통 9월 중순에서 10월 중순 사이, 한 해 농사로 거두어들인 열매들, 특히 포도와 올리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축제였다.(탈출 23,16; 레위 23,39) 이 때 유다인들은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에서 있었던 한 사건, 이집트를 탈출한 다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하기까지 광야에서 하느님이 돌보아 주셨던 사건을 함께 기념했다.(레위 23,39-43) 초막절을 기념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찾는 순례자들은 레몬나무·상록수·버드나무·팜나무 등의 가지를 흔들면서 하느님을 찬미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그 주변에 있는 키드론 골짜기와 올리브 동산에 임시로 거처할 수 있도록 초막을 짓고, 칠일 동안 머물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매일 거행되는 예식에 참여한다.(레위 23,42-43) 한편 예루살렘에 오지 못한 유다인들은 집 안마당이나 옥상에 초막을 만들어 초막절 내내 그곳에 지낸다.

 

 

 

 

 

 

 

초막절 축제 기간 동안 예루살렘 성전에서 매일같이 거행되는 예식은 크게 물의 예식, 빛의 예식, 그리고 성전을 바라보는 예식 세 가지다. 물의 예식과 빛의 예식은 하느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조상들에게 생수를 주어 목마름을 없애 주셨고,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음을 기념하는 예식이다.

 

초막절 내내 순례객들은 매일 아침 사제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 언덕에서 남동쪽 아래에 있는 실로암 샘까지 행렬을 지어 내려간다. 그동안 군중은 오른손에는 초막을 상징하는 나뭇가지를 들고, 왼손에는 가을추수를 상징하는 오렌지 가지를 흔들면서 시편 113편부터 118편을 번갈아 부른다. 실로암에 도착하면 예식을 주관하는 사제가 연못물을 물통에 퍼 담는다. 그런 다음 순례객들은 다시 행렬을 지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올라간다. 성전에 도착하면, 사제는 길어온 물과 제단 위에 놓인 포도주를 성전 제단에 뿌린다. 이때에 사제를 둘러싼 군중은 크게 기뻐하면서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는 이사야서 123절의 찬미가를 부른다.

 

이러한 의식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방랑할 때 하느님이 목마른 그들을 위해서 바위를 쳐 물을 내어준 사실에 감사드리고, 또 금년 한 해도 비를 내려주시어 밀농사와 포도농사를 잘 짓게 해주심에 감사하면서, 다음 해에도 넉넉한 비를 내려 주시기를 청하는 예식이다. 또한 물의 예식에는 모세와 같은 메시아가 어서 와서 토라를 통한 생명의 물을 이스라엘에게 흠뻑 내려줄 것을 간청하는 것도 포함된다.

 

초막절 축제 7일째 되는 마지막 날은 명절의 절정이다. 이날은 실로암에서 물을 길러 제단에 붓는 예식을 일곱 차례 반복하고, 사제가 희생제물을 바치면서 내년 농사에 필요한 비를 청원하는 장엄 기도를 바친다. 이때에는 모든 사람이 머리를 숙여야 한다. 바로 이 기도가 바쳐지던 날, 곧 축제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는 일어서시어 큰 소리로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7,37-38)라고 외치신다. 당신이 생명의 물을 주는 분이심을 밝히신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신이 초막절의 완성이시자 모든 인간의 목마름을 해소시켜 주는 구원자이심을 밝히신 것이다.

 

한편 초막절 행사에서 중요한 또 다른 예식은 빛의 예식이다. 이 예식 또한 물의 예식처럼 매일같이 거행되었다. 여인의 뜰에 설치된 네 개의 높은 대 위에는 촛대가 일곱 개 달린 대형 황금촛대가 있었다. 도합 28개의 황금촛대는 석양 무렵이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그러면 순례자들은 그 아래에서 춤을 추고 사제들은 시편 120편에서 134편까지 노래했다. 초막절 기간 동안 황금촛대에 촛불을 밝히는 이유는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기원하기 위해서였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하느님이 불기둥으로 이끌어 주신 것에(탈출 13,21-22) 감사드리고, 어둠속을 헤매고 있는 이방인들이 개종하여 밝은 빛으로 빛나는 예루살렘으로 순례 오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였다. 대형 황금촛대(지금의 메노라)들은 성전을 둘러싼 담보다 더 높은 대 위에 놓여 있어(30미터), 불을 켜면 그 빛이 수마일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었다. 밤새 밝게 타오르던 28개의 촛불은 다음날 새벽,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에 끄는데 그 이유는 첫 햇살이 예루살렘 성전을 비추기 위해서다. 첫 햇살이 성전을 비추기 시작하면, 사제들은 성전 마당을 행렬하면서 성전이 하느님의 거처요 세상의 빛임을 노래했다. 이 노래의 후렴은 시편 271절로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이다.

 

이렇게 빛을 기념하여, 세상 만민이 빛을 향해 나오기를 기원하는 축제의 절정인 마지막 날에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라고 장엄하게 선언하신다. 당신이 예루살렘은 물론이요, 온 세상을 비추는 참된 빛이심을 밝히시며, 초막절을 완성하는 분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9장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치유하심으로써 당신이 참으로 세상의 빛임을 입증하신다.

 

물과 빛의 예식에 이은 세 번째 예식은 성전을 바라보는 예식이다. 이 예식은 사제들이 초막절 7일 동안 매일같이 닭이 울 무렵에 성전 동문 지역까지 행진해 가서 성전을 등지고 동쪽을 향해 섰다가 태양이 떠오르면, 태양을 등지고 성소를 바라보며 기도하였다. 사제들은 태양을 등지고 성전을 바라보면서, 시편 118, 28-29을 읊으며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참된 유일신임을 고백했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찬송합니다. 저의 하느님, 당신을 높이 기립니다. 주님을 찬송 하여라, 좋으신 분이시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이로써 성전을 바라보는 예식은 끝났다.

 

 

 

 

*초막절과 예수님: 하느님 말씀은 세상에 와서 우리들 가운데 천막을 치셨다.(1,14) 축제에 참석한 이들은 예수 안에서 새롭고 기대치 않게 오래된 광야 생활의 사건을 만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들의 조상들과 함께 걸으셨다. 아들인 하느님이 지금 그들과 함께, 신비스런 불기둥과 구름으로가 아니라 볼 수 있는 사람으로, 친구로 함께 걸으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움직인다.

 

1. 예수님의 초막절 가르침과 유다 지도자들과의 마찰(7,1-52)

 

*7,1-3: 안식일 법을 어기고 스스로 하느님과 동등하다고 선언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유다 지도자들이 죽이려 들자 파스카 축제 때 예루살렘에 올라갈 수 없었고, 갈릴래아 지방에 6개월 이상 머물러 계시면서 그 지방을 두루 다니셨다. 당시 갈릴래아는 헤로데 안티파스가 통치하고 있던 지역으로 예루살렘의 유다 지도자들의 권한이 미치지 못했다. 왜 피하셨을까? 아직 당신의 때, 곧 아버지께서 정하신 죽음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는 오히려 복음을 거부하는 곳에 의미 없는 피를 흘리기보다 복음을 환영하는 곳으로 가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할 필요가 있었다.(마태 10,23 참조) 교회사를 보면 박해에 맞서 장렬하게 순교한 이들도 있고, 박해를 피해 지역으로 흩어져 복음을 널리 전파한 이들도 있었다. 어느 한 가지만 옳다고 볼 수 없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용감히 순교할 수도 있고, 용감하게 도망칠 수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재물을 포기할 수도 있고, 재물을 소유할 수도 있다. 그때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식별을 할 필요가 있다.

*7,4-6: 예수의 형제들은 사촌 내지는 육촌 형제이다. 일반적으로 히브리어로 형제는 아흐이다. 그런데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초대교회 신자들은 아흐를 하나같이 아델포스로 번역했다. 아델포스는 친형제를 의미하지만 아흐는 친형제 혹은 가까운 친척을 다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형제들을 요셉의 아들들또는 마리아의 아들들이라고 말한 대목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님이 12살 때 파스카 순례를 가족이 모두 떠나지만 동생들에 대한 언급은 없다. 현실적으로 어린 동생들이 있었다면 그들을 버려둔 채 예수님만 데리고 갈 수는 없다. 아무튼 친척 형제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믿고 과시하라고 유혹자처럼 행동한다.(마태 4,5이하) “정말 네가 메시아라면 촌구석에서 괜히 폼만 잡고 있지 말고 유다 땅 예루살렘에 가서 메시아임을 증명해 보라.”고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다. 형제들은 생명의 말씀인 예수님 곁에서 오랜 세월을 함께 한 형제들도 그분의 위대함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공관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형제들은 공생활 시작부터 예수님을 방해했다. 예수님이 정신 나갔다고 생각하고 붙들러 나갔다.”(마르 3,21) 그러나 예수님은 가족과 친지들의 저항과 방해에 맞서 관계를 악화시키거나 단절시키지 않으셨다. 그렇게 형제들을 참고 기다린 결과 그들은 변화되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사도 1,12.14) 만약 예수님이 형제들과 인연을 끊어버리셨다면 과연 그 변화가 가능하겠는가?

*7,6-12: 예수님의 는 십자가 죽음으로 통해서 아버지께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번 축제에는 그 때가 아니다. “나는 이번 축제에는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신 것은 단순히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아버지께 올라가는 가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형제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나서 뒤따라 상경한다. 이 뒤 늦은 상경 또한 하느님의 뜻이었다. 예수님이 은밀하게 올라가신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11에 나오듯이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붙잡을 생각으로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형제들의 요구처럼 바로 올라가지 않고 나중에 예루살렘에 간 것은 그들의 세족적 의도, 곧 세상의 명성이나 권력을 얻으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점이 강조된 셈이다.

*초막절 중반에 가르침을 주시는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불신앙(7,14-36)

*7,14: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까지 대략 3,4일 정도 걸린다고 보면 초막절 첫 날에 갈릴래야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담대하게 가르치시자 유다인들은 즉시 의심을 품고 세 가지 질물을 던진다.

-이 사람은 라삐 학교 출신이 아니지 않는가?(7,14-15)

-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는가?(7,25-27)

-이 사람이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7,35)

이 세 가지 질문의 대답은 모두 하늘이다.

*7,15: 당시에는 하느님이나 종교적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수석 사제 계급이나 라삐 전문학교에서 라삐가 되기 위한 특별 훈련을 받은 사람이어야 했다. 오히려 예수님은 기초 회당 교육만 받은(토라 읽기) 평번한 시골 목수였다.

*7,17-18: 유다 지도자들의 신앙생활의 중심은 자기 자신의 위대함과 우월함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슨 행위를 하시든 늘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려 하신다.

*7,21-23: 할례 규정(레위 12,3)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서 안식일 법을 어기는 것이 허용된다면, 하물며 긴 세월 병고에 시달려 온 하느님의 자녀를 고쳐주는 행위는 마땅히 허용되어야 한다는 반박이다. 더군다나 몸의 248 지체 중에 한 지체를 다루는 할례가 안식일보다 우선된다면, 몸 전체를 온전하게 만드는 일보다 우선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7,25-30: 메시아 출현에 대한 성경 근거는 다음과 같다. 말라키 예언자는 메시아의 출현이 홀연히 비밀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고(말라 3,1), 미카 예언자는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라고 했다.(미카 5,1-2) 이에 상응하여 요한복음서 27절에서는 그리스도가 비밀스럽게 올 것이라고 믿는 견해가 제시되고, 42절에서는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으로 믿는 견해가 제시된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보기에는 예수가 이 두 가지 예언을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출신의 목수이다. (물론 베들레험에서 태어나셨지만 이는 일반 유다인들에게 알려진 사항이 아니다. 나자렛이 고향인 예수 외에는)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영적인 출신지가 분명하기에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위로부터’(3,31) 오신 분, 하늘에서오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이시다. 이에 유다인들은 분노하여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한다. 특히 28절의 말씀을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상당히 거슬리고 모욕적인 말이다. 자신들을 선택된 민족, 하느님의 백성으로 믿고 있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모른다고 했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나 손을 뻗어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한다.

*7,35-36: 이 사람이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의역하면 나는 곧 아버지께 돌아 갈 것이다. 나희는 나를 거부하는데 그것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예수님의 주장이 여기서 먹히지 않자 그리스인들 사이에 흩어져 사는 동포들에게 가겠다는 말을 알아들은 것이다.

*7,37-39: 팔레스타인 땅에서 봄부터 시작되는 건기는 초막절 기간이 되면 그 절정에 달하게 된다. 그러니 이 기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을 얼마나 기다리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간절한 기대 속에 사제는 초막절 축제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농사에 필요한 비를 넉넉하게 내려주시기를 기도한다. 그 순간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큰 소리로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라고 선포하신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이요 세상 모든 인류를 향한 공적인 초대이다. “그의 속이란 와서 믿는 이의 속이냐, 예수의 속이냐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많으나,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온 예수님의 죽음의 순간과 많이 연결시킨다. ‘속에서’, 곧 육화한 말씀의 가슴에서 물이 흐르는 것이다. “흘러나올 것이다.” 미래 시제. 이는 지금이 아니라 앞으로 언젠가 성령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앞으로 언젠가는 오순절 성령 강림일을 말한다.

*7,40-44: 예수님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들. 누구나 생명의 초대를 받지만 그 초대를 거부할 수도 있다. 예수님의 은총 역시 우리의 태도와 믿음의 정도에 따라서 은총이 덜 주어질 수도 있고 더 많이 주어질 수도 있다. 한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군중이 던진 물음에 요한 공동체 독자들은 빙그레 웃었을지 모른다. 예수님이 본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는데, 군중이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요한복음사가가 즐겨 쓰는 아이어니 기법이다.

*7,45-52: 성전 경비병들의 증언. 사실 이들은 레위인들로서 군사훈련이나 무술훈련보다는 종교적인 훈련을 더 많이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제들의 보조자로서 성전에서 제사를 돕고, 필요하면 수석 사제들의 명을 받아서 성전의 질서와 치안을 담당하던 이들이다. 이들은 성전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라삐, 훌륭하다는 스승들의 가르침을 많이 들은 이들이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매료당한다. 이들은 예수님을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 즉 신적 존재라고 고백한 셈이다. 경비병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을 변호하자, 바리사이들은 화를 내며 경비병들을 저주한다.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의 히브리어는 암 하아레츠 곧 땅의 백성이다. 본디 이 말은 땅을 경작하는 백성이란 뜻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율법을 거스르는 죄인들을 가리키게 되었다. 갈릴래아 소작농들은 이중과세에 시달렸다. 로마는 공권력을 동원해서 강제로 세금을 징수했고, 세금을 내지 않는 사람에게는 법적 제제를 가했다. 그러나 십일조에 관해서는 강제적인 조치가 있지는 않았다. 그러자 갈릴래아 농부들은 차츰 로마에 세금을 내면서 십일조는 바치지 않게 되었고, 결국 율법을 어기는 죄인이 되고 만다. 한편 니코데모는 산헤드린을 향해 예수님을 변호하는 발언을 한다. , 동료 위원들이 율법이 정한 소송 절차를(신명 1,16-17; 19,16-17) 제대로 지키기 않음을 은근히 지적한다. 그러나 그 이상은 더 나아가지 않는다. 물론 나중에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할 것이다. 산헤드린 동료들이 니코데모를 천민 갈릴래아 사람으로 간주하면서 성경을 연구해 보라고 힐책한다. 그렇다면 과거 역사에 정말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오지 않았단 말인가? 아니다. 요나와 나훔이 여기 출신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기다리고 있는 그 예언자이다.

 

2. 비참과 자비의 만남(7,53-8,11)

*들어가면서

요한복음서가 기록된 것은 대략 1세기 말이지만 간음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4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첨가된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382년 이전 필사본들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창작인가? 아니다. 대다수 성경학자는 간음한 여인에 대한 내용을 예로니모 성인(347-420)이 지금 자리에 넣었다고 본다. 예로니모 성인이 불가타 성경을 번역할 당시 간음한 여인에 대한 일화가 기록된 필사본들이 독립적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예로니모 성인과 동시대 인물로 약간 앞서 활동했던 암브로시오 성인과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사건의 역사성과 영적 가치를 인정해 성경의 한 부분으로 읽혀지기를 원했다. 이 사건의 영적 가치는 하느님의 정의가 징벌이 아니라 용서이며, 율법이 아니라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성인이 간음한 여인 사건을 구태여 7장과 8장 사이에 넣은 이유는? 여러 차례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찾고 있었던 유다 지도자들에게 간음한 여인 사건은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한 책략으로 매우 적절한 경우였다. 또 이 사건 다음에 유다 지도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심판하지만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고 말씀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끝으로 요한복음서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생명과 빛의 신학이다. 이 신학은 간음한 여인 사건 다음에 나오는 8,12 이하의 본문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아마도 예로니모 성인은 자신의 신학이 담긴 본문을 전해하기 전에 성경을 읽는 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적절하며 구체적인 예로 간음한 여인 사건을 제시했을 것이다. 간음하다 걸린 여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생명신학), 또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밝은 빛으로 나오게 되었다.(빛의 신학)

 

그렇다면 예로니모 성인은 왜 처음부터 성경 안에 있지 않던 이 이야기를 구태여 삽입했을까? 예로니모 성인이 오랜 세월 성욕에 시달리며 살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가 성적 욕망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눈을 감으면 춤추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곤 했다. 그는 성욕을 억제하려고 단식하다가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던 적도 있다.(밥 숫가락 들 힘만 있어도)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 얼굴은 단식을 창백했다. 손발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런데도 마음은 욕망으로 불타고 있었다.” 예로니모 성인은 성경번역에 더욱 열정을 쏟아 넣어 자신의 타오르는 정욕을 승화시키려 했다. 두 번의 환시 체험 끝에 그는 두 번 다시 성욕에 시달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간음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는 예수님의 공생활 당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다. 그런데 어떤 연유에서 복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독립된 필사본으로 전해졌던 것일까? 초대 교회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엄격한 성윤리와 규범을 정해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에게 어떤 참회도, 보속도, 처벌도 없이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8,11)라고 하셨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자칫 신자들이 오해할 수도 있겠다고 보아 성경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로니모 성인이 간음한 여인 이야기를 요복복음서에 삽입한 것은 그가 체험한 강렬한 은총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성인 덕분에 우리는 참으로 자비로운 예수님의 모습과 죄인들을 살리시는 구원자의 모습을 생생히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7,53-8,4: 이른 아침 어둠이 가시는 시간에, 욕망의 혼돈에 빠져 있던 여인이,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의 혼돈에 빠져 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끌려 예수님 앞에 온다. 사실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의견을 듣지 않고도 이 사건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여인을 데리고 온 것은 순전히 예수님을 잡아들이기 위한 꼼수였다. 유다 법에서 정혼하지 않은 처녀가 성관계를 갖거나 창녀가 외간 남자와 성관계를 가졌다 해서 간음죄로 처벌되지는 않는다. 간음죄는 약혼이나 결혼을 한 여인에게만 해당된다.(레위 20,10; 신명 22,22-23) 그러므로 이 여인은 약혼을 했든, 유부녀이든 간에 법적으로 부부관계에 묶여 있는 사람이다. 모세의 법에 따르면 간음죄를 범한 사람을 죽이도록 규정은 하지만, 그 방법은 정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에제 16,38040에서 보듯이 모든 종류의 간음죄는 돌로 쳐 죽이는 것이 통례였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간음을 한 여인은 있는데 남자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유다 사회가 가부장 사회였지만 간음죄만은 남녀가 평등했다. 간음죄를 저지른 남자는 여자와 함께 돌에 맞아 죽게 되어 있었다.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온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여인이 간음을 하고 있던 현장을 덮쳐 붙잡아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마도 유다 지도자들은 남자를 다른 곳에 묶어 두었거나 도망하게 했을 것이다. 예수님을 넘어뜨리려면 여인 혼자 있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진퇴양난의 질문.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라고 말한다면, 모세의 율법을 거스르게 되고 고발당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율법대로 처리하라고 하면 자비와 용서를 선포한 예수 자신의 복음과 모순된다. 더욱이 로마 정부에 반기를 드는 자로 고발당할 수도 있다. 당시 로마 정부는 유다인들로부터 죄인을 재판하고 사형할 권한을 박탈했기 때문이다.

*8,6-8: 성경에서 하느님의 손가락이 세 번 무엇인가를 쓰셨다고 한다. 첫 번째, 하느님이 시나이 산에 나타나시어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고 그들이 지킬 십계명을 돌판 위에 새겨 넣으셨고, 두 번째 바빌론 왕 벨사차르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 온 하느님의 성작으로 술을 마실 때 하느님의 손가락이 벽에다 므네, 므네, 트켈, 그리고 파르신”(다니 5,25)이라고 쓰셨고, 세 번째가 이 간음한 여인 장면에서다.

*예수님은 땅에다 무어라고 쓰셨을까? 먼저 글을 쓰다쓰다은 그리스어로 그라포 γρφω . 본문에서는 이 말 대신에 그라포 앞에 접두사 카타 κατα가 붙은 것이다. 카타는 반대해서, 대항해서란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는 것은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는 유다 지도자들에 대항해서 무엇인가를 쓰셨다는 말이다. 아마도 그들의 죄에 대한 것일 수 있고, 그들을 공격하는 무슨 말인가를 쓰셨을 수도 있다. 예수님은 유다 지도자들이 판결을 재촉하자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하고 말씀하신 다음, 다시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그러자 나이 든 사람부터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그들의 구체적인 죄를 가장 나이 많은 사람부터 시작해서 나이 순서대로 적었기 때문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예수님이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라고 하실 때 말 그대로 어떠한 죄도 없는 사람을 뜻했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성적으로 죄 없는 사람을 뜻했을 가능성이 크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풀어보면, “당신들 가운데 몸으로든 마음으로든 성적으로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시오.”가 될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은 이 말씀을 마치시고 다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만일 일 말씀 후 군중을 바라보았다면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여인을 향해 돌을 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채 허리를 굽혀 땅에 무엇인가를 쓰심으로써 그들의 흥분과 소란스러움을 압도하는 깊고 고요한 침묵을 마련하셨다. 그리하여 흥분해 있던 그들의 내면이 서서히 가라앉게 되었다. 이제 모두 떠나고 예수님과 그 여인만이 남게 된다. 예수님은 간음죄를 범한 여인과 일대 일로 대하시면서 사랑받을 수 없는 상태에 떨어진 여인을 지극한 자비로 감싸주시고 용서해 주심으로써 사랑받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하신다. 여인은 군중 한가운데 세워졌다. 군중 한가운데 세워졌다는 것은 모든 이 앞에서 더할 수 없는 수치를 당했다는 뜻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miseriamisericordia가 만났다고 표현한다. 곧 비참과 자비가 만났다는 것이다.

*8,10-11: “여인아하고 불렀을 때, 본문에 나오지 않지만 다정한 눈빛으로 보셨을 것이다. 또 자신의 겉옷을 벗어 여인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 주셨을지도 모른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여인을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한 도구 정도로 간주했지만 예수님은 고귀한 인격체로 대하셨다. 예수님의 단죄하지 않겠다는 말은 주님인 내가 너를 용서하겠다는 말과 같다. 사실 이 말씀보다 더 큰 기적은 없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 죽어 가는 소년을 한마디 말씀으로 고치신 것, 적은 양의 음식으로 수많은 사람을 배불리신 것, 폭풍우 치는 바다 위를 걸어오신 것, 그 어느 것도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라는 말씀보다 더 경이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말씀을 우리가 무슨 죄를 짓든 무조건 눈감아 주고 용서해 주신다는 식으로 알아 들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시는 분이 아니시다. 다만 죄인이 다시 일어나 새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자비와 사랑을 베푸실 뿐이다. 예수님은 자기 죄도 모르고 죄로 인해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고 하시지는 않는다. 여인은 간음죄로 이미 죽음의 고통을 맛본 사람이다. ‘교회는 성인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 아니라 죄인들을 치료하는 병원이다.’-모튼 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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