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1-2강의: 요한 2,23-4,54

 

니코데모를 가르치심(2,23-3,21)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2,24):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가짜이기 때문이 아니라 기적을 보고 믿는 초보적 신앙은 세속적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6,26 참조) 기적은 때로 확실한 믿음보다 불신을 낳는다. 홍해를 건너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많은 기적을 보고도 의심했고, 끊임없이 또 다른 기적을 요구했다. 기적은 주님이 계심을 알려주는 정도면 충분하다. 기적이 너무 많으면 우리는 약해진다. 사실 사탄도 기적을 일으킨다.(2테살 2,9-10) 앞으로 등장할 니코데모 역시 기적에 바탕을 둔 초보적 믿음에서 시작한다.

*니코데모의 신분과 내적 세계(3,1-2): 당시 바리사이 수는 1세기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6천 명 정도이다. 그러므로 바리사이는 존경의 대상이다. 바리사이파라는 말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란 뜻이다. 모세오경에 나오는 613개 계명은 물론, 10,633개나 되는 체식도 철저히 지키겠다고 서약한 사람들이다. 니코데모 역시 그 율법을 철저하게 지킴으로써 세상 종말에 영원한 생명을 얻고 부활할 것을 믿었다. 게다가 그는 산헤드린 의원이었다. 산헤드린은 71명으로 구성된 유다 최고의회 혹은 최고법정이었다. 또 그는 이스라엘 전역에서 인정받는 율법교사였다. 10절을 보면 선생이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 ‘ὁ’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그가 공인된 율법교사임을 알려준다. 이러한 신분을 지니고 있는 니코데모는 대낮에 예수님을 만나러 올 수 없었다. 발각되는 순간 그는 예수님을 적으로 여긴 산헤드린과 척 지게 된다. 또 한편 그가 밤에 찾아 왔다는 은유적인 의미는 그동안 영적 어둠 속에 살다 참 빛이신 예수님께 왔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라고 부른다. 얼핏 보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승이라는 말 앞에 정관사 ‘ὁ’를 붙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예수님을 모세,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 등 여러 예언자 가운데 한 분으로 인식한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요(1,14), 하느님과 하나이신 분이요(10,30.38), 육화된 하느님(1,1.9)이시다.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은 이유: 그는 기적을 보고 혹시 이분이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직접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이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3): 율법 행위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구약의 믿음이 성령으로 다시 태어남으로써 들어갈 수 있다는 신약의 믿음으로 대치된다. 자세히 그 의미를 보자.

*“누구든지”: 유다인은 물론 사마리아인과 이방인들까지 모든 사람(보편성)을 의미한다. 동시에 한 개인을 가리킨다. 구원은 아브라함의 후손, 즉 민족적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 이뤄진다. 주님을 영접하고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사람한테만 주어진다.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직역 반드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지지 않으면” ‘위로부터(아노텐 νωθεν)’다시라는 뜻도 지니고 있고, ‘태어나지는 수동형이므로 하느님이 이루시는 것이다. 반드시(δει) ~해야 한다. ,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3,5: “물과 성령으로누구나 성령에 의해서만 다시 태어난다. 그 성령은 세례를 통해서 주어진다. 육으로 태어난 다음 세례성사를 통해 성령으로 또다시 태어난 사람은 나중에 한 번만 육으로 죽으면 된다. 그러니 두 번 태어나 한 번 죽는 것이다.

*3,6: 육에서 태어난 것은 여전히 소멸될 목숨에 지나지 않는다. 요한복음은 죽을 운명을 지닌 인간의 한계와 나약성, 무상성을 가리키기 위해 을 사용한다.

*3,7-8: ‘너희는 니코데모가 대표하는 모든 사람이다. ,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초보적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 율법을 열심히 준수함으로써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히브리어 루하와 그리스어 프네오마는 영과 바람을 뜻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바람의 은유는 성령의 특성을 가리키는데, 첫째 성령은 하느님 자신이므로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다. 둘째, 성령은 다양한 모습으로 역사하시며 우리를 성장시킨다. 셋째, 성령은 어디든 현존하시며 전체적 진리를 갖고 계신다. 예화: 햇님 초록색 잎, 달님 은빛 잎, 바람 항상 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본다. 성령은 오류가 없다.

*3,9-11: “너는 이스라엘의 성서학자요 신학자인데...” 예수님의 꾸지람. 니코데모가 진성한 성서학자라면 구약에서 예언자들이 수차 예고한 하느님의 약속, 곧 메시아 시대에 인간은 물과 성령을 통해 구원받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아들여야 한다. (에제 36,25-27) 성경연구는 많이 하지만 믿음이 없어 성경이 증언하는 주님을 거부한다는 이야기이다. 11절에서 대화의 주체가 나와 너에서 우리와 너희로 바뀐다. 이는 예수님의 시대에서 제자들의 시대로 바뀐 것을 의미한다. 이제 곧 제자들이 자기들 시대의 유다인들에게 신앙을 고백하고 증언한다.

*3,12: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세상일, 사람들이 성령에 따라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은 땅 위에서 버러지는 일들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제 니코데모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십자가에서 영광스럽게 되시리라는 신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이 있으니 세상일은 사람이 되신 예수님 또는 제자들의 증언을 뜻하고, “하늘 일은 영광 속에 들어 높여지신 예수님과 성령의 증언을 가리킨다.

*3,13-15: ‘들어 올려짐(휩소토 ψωθω)’고양되어지다.’ 또는 영광을 입다.’라는 뜻이다. 공관복음서는 십자가를 수치와 비참으로 보지만 요한복음 저자는 이 단어를 씀으로써 십자가를 영광의 자리로 표현한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당신의 신적 정체를 분명히 드러냈다.(8,28; 12,32 참조) 요한복음 저자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꼭 필요하기에 반드시(δει) ~해야 한다.’ 는 표현이 들어간다. 이는 십자가 죽음이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들어 있었음을 뜻한다.

*“뱀을 바라보면 뱀의 힘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죽음을 바라보면 죽음의 힘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의 죽음을 말합니까? 바로 생명의 죽음입니다. (중략)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심으로써 죽음이 사라졌습니다. 돌아가신 생명이 죽음을 없애버리신 것입니다. 생명의 충만이 죽음을 삼켜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죽음을 흡수해 버렸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3,15: 요한복음은 생명의 복음서이다. ‘살다’ 17, 생명 36번 등장. 생명을 가리키는 단어는 조에(ζωἠ)이고, 목숨을 가리키는 단어는 푸쉬케(ψυκἠ)이다. 생명은 영원한 생명을 가리킨다. 요한복음이 하느님 나라보다 생명혹은 영원한 생명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영생을 살아간다는 점이다. 구원의 현재성. 둘째, ‘하느님 나라는 유다교 전통에서 나온 개념이므로 헬라계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낯설다. 셋째, 하느님 나라는 자칫 공간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생명은 내적인 것, 곧 구원의 내면화를 설명하기에 좋다. 넷째, 이미 생명이 주어진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고 회당에서 추방당해도 그 생명이 있기 때문에 인내하고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영생은 로고스 찬가에도 나오지만 지금 우리가 주님과 함께 누리는 생명이다.(1,4; 1요한 5,13) 한편 영생이란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믿는 이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인격적 사랑의 관계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17,3)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온전히 상대와 결합되어 아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예수님과 우리가 갈림이 없이 일치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이 경험은 초월적인 것이므로 형언하기가 어렵다. 하루살이-메뚜리-개구리 비유.

*3,16: 하느님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감동적으로 요약, 압축. 여기서 세상은 모든 이를 말한다. 죄인도 포함된다.(마태 9,13) ‘너무나는 그리스어 후토스(οτωξ)를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너무나이외에도 이런 식으로, 이런 방법으로란 뜻도 있다. ‘이런 식으로안에는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 싶어 하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잘 드러난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구리 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았듯이,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 수 있다. ‘사랑하신 나머지아가페는 신적 사랑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은 과거, 현재, 미래에도 계속되는 영원한 사랑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사랑의 동사가 과거형으로 되어 있다. 이는 뒤에 따르는 외아들을 내주시어도 같은 시제인데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십자가 사건은 과거에 있던 딱 한 번의 사건이었기 그렇다. 참된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사랑과 심판의 역설(3,18-21): 심판하는 자는 하느님이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빛을 거부한 인간 자신이다. “이미 심판을 받았다.”과거형으로 빛이신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그 순간부터 계속 어둠 속에 머물게 된다는 말이고 그것은 그 사람이 자초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상선벌악의 냉정한 신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니코데모는 신앙의 여러 단계를 거쳐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는 처음에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하며 반신반의했다. 아직 성령으로 다시 태어남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변화된다. 그 이후 그는 산헤드린에서 동료 위원들에게 예수님을 옹호하는 발언을 한다.(7,51) 이는 그동안의 기득권을 다 박탈당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 탈바꿈한 것은 예수님의 장례식 때였다. 그는 장례를 치르고자 비싼 향료 백 근을 가지고 왔다.(19) 당시 장례 관습에 따르면 백 근이나 되는 향료를 쓰는 경우는 왕의 장례식 밖에는 없었다. 그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름으로써 공개적으로 용기 있게 자신의 믿음을 천명했다.

*파견 받은 세례자 요한(3,22-30):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 동편에서, 예수는 서편에서 세례를 베푼 것으로 말들 하지만, 어느 한 장소에 국한되지 않았을뿐더러 함께 세례를 베풀지도 않았으리라 추정된다. 공관복음에는 예수가 세례를 베풀었다는 보도가 전혀 없고 다만 예수가 세례자의 세례를 인정한 보도(마르 11,30-33; 루카 7,29-30; 마태 21, 32)나 부활 후 세례를 베풀라는 예수의 명명만 있다.(마태 28,19; 마르 16,16) 그러나 반면 요한복음은 예수가 세례를 베풀었다고 보도하면서 다른 한편 예수 친히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베풀었다고 한다.(4,2) 만일 예수가 세례를 베풀었다면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능가하는 것이었고, 제자들만이 세례를 베풀었다면 그것은 예수 추종의 세례로써 다만 예수는 그것을 허락했을 것이다. 본연의 성령 세례는 부활 후 비로소 베풀어진다. 요한은 처음으로 유일하게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른 사람이다. 특히 제자들 앞에서 이 말을 외침으로써 자기 제자들로 하여금 주님을 따라가도록 했다. 이 부분은 요한의 고별사이다. 그가 인류 구원사에서 자신이 맡은 사명을 모두 완수하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기 때문이다. 고별사는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원망하자 그들에게 한 말이다. 그는 파견 받은 자로서의 사명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역할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 요한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사임을 알고 있었기에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는 다른 말로 하면 신부의 관심과 사랑을 얻는 이는 친구가 아니라 신랑이다.’는 말이다. 그는 이 말로 사람들의 관심을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께 향하게 했다. 모든 봉사자는 요한의 이런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 봉사자들은 신부를 신랑인 예수님 손에 넘겨줄 때까지 수고하는 것이지, 자신이 신부의 손을 계속 잡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랑의 친구는 도구일 뿐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30): 교회는 해마다 624일을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로 기념한다. 624일은 하지(6/21)와 연결되어 있다. 하지는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날이기도 하지만 이날을 기점으로 낮이 점점 짧아지기 시작한다. 빛이신 예수님의 출현으로 자신은 점점 작아져야 하는 것에 착안해 교회는 상징적으로 세례자 요한의 탄생일을 624일로 정한 것이다. 이 구절에도 반드시(δει) ~해야 한다.’ 가 들어가 있다. 세례자 요한은 마치 해가 떠오르는 시간에 존재한 등불 같은 존재였다. 예수님이라는 밝은 빛이 이 세상을 비추고 있기에, 세례자 요한이라는 등불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서 오시는 분(3,31-36):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충분히 다루었으므로 각주를 생략한다.

 

 

 

2.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4,1-42)

니코데모

사마리아 여인

선민 유다인 남자, 존경의 대상

이방 혼혈족 여자, 멸시의 대상

공인된 이스라엘의 스승, 산헤드린 의원

학식도 권력도 없는 비루한 사람

바리사이로서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며 사는 도덕적 사람

다섯 번의 결혼과 이혼 경력을 가지고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 중인 비윤리적 사람

예수님을 남의 눈을 피해 밤에 만나러 옴

예수님을 낮에 공개적인 장소에 만남

니코데모를 통해서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의롭게 산다 해도 구원받지 않아도 될 만큼 의로운 사람은 없음을,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천대받고 손가락질 받으며 산다 해도 구원에서 배제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주님은 죄인이나 의인이나 모든 인간의 구원자이시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끔 주님의 신부/아내로 그려진다.(이사 62,4-5; 에제 16,8; 호세 2,21) 이와 마찬가지로 신약성경 여기저기에서 예수님은 신랑이요, 신자(=교회)들은 그분의 신부로 증언된다.(요한 3,29; 마르 2,18-22; 2코린 11,2; 에페 5,25-31; 묵시 21,2 참조)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실제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그 여인은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결혼하게 된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온전히 믿으면 그분의 신부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바로 우리다.

 

*4,5: ‘반드시(δει) ~해야 한다.’ 삽입. 사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이었기에 아니 갈 수 없었다. 언제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움직이시는 예수님은 사마리아에 만나야 할 영혼들이 있음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당시 유다인들은 이 부정한 사람들과 같은 집기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 어떠한 형태의 접촉도 기피했다. (집회 50,25-26; 마태 10,5; 루카 9,52; 10,33 참조)

*4,6: 야곱의 우물에 도착한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예수님은 목마른 영혼을 찾아 뜨거운 태양을 받으며 오전 내내(6~7시간 정도) 걸어오셨다. 그것도 먼지가 이는 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오셨기에 몹시 지치고 피곤하셨다. 그래서 우물가에 털썩 주저앉으셨다. 이는 당시 가현설을 반박하는 사례이다. 예수님은 육신을 지니신 온전한 인간이다.

*4,7: 당시 여인들은 더위를 피해 주로 아침이나 저녁에 물을 길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한낮에 물을 길러왔다. ?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리는 것이 싫어 아무도 없는 대낮에 물을 길어 왔을 것이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사실은 물을 달라고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청하시지만 4장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물을 마셨다는 대목은 없다. 오히려 4,10에 가서 여인이 예수님께 물을 청한다.

*4,8: 제자들을 모두 고을로 먹을 것을 사러 보냈다. 얼마나 많은 양의 양식이 필요하면 12제자를 다 보냈을까? 둘 만의 은밀한 대화를 위해서 일부러 보내신 것이다. 사실 영혼과 관련된 문제는 어느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문제로 구세주이신 예수님과 당사자 사이의 문제이다.

*4,9: 그리스어 성경에는 선생님이 아니라 당신’, ‘’(σὐ)이다. 그러나 11절에 가서야 태도를 바꾸어 선생님’(=sir)이라 부른다. 이것은 당시 관습을 무시하고 말을 거는 예수님을 방어하며 당신또는 라고 부른 것이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돼지보다 더 더럽고 부정한 존재로 간주했다. 특히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생리를 한다며 태생적으로 부정한 존재로 여겼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금기를 깨고 그 여인과 대화를 하며 두레박의 함께 쓰려는 파격적인 청을 하신다. 이는 당시 요한 공동체의 상황을 보여주기도 한다. 거기에는 적지 않은 이방인 출신이 있었고, 그 중에는 사마리아 출신도 있었다. 이들은 유다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께서 사회규범을 깨지 않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서지 않았다면 그 여인은 절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4,10: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물, 예레 2,13 참조.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로지 그분뿐이시다.

*4,11-13: 여인은 아직도 혈통에 메어 있다. 혼혈족이면서 야곱을 자기네 조상이라고 허세를 부린다. 한편 야곱의 우물(=육적인 물)은 아직 구약의 율법을 통한 구원관을 상징한다. 그러나 곧 예수님께서 그것을 생명의 물(=영적인 물)인 당신으로 대치하실 것이다. 선생님으로 번역된 희랍어 키리오스는 본디 주인을 뜻하는 말로서 주님으로 번역해야 하나, 여기서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고백이 아니라 상대를 그냥 높여 부르는 단순한 호칭에 불과하다.

*4,14: 앞의 이 물을 마시는 자에서 마시는’(피논, πνων)은 계속되는 행위를 나타내는 시제이다. 야곱의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기에 그럴 때마다 다시 마셔야 한다는 뜻이다. 한편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에서 마시는’(피에, πἰῃ)은 한 번만 마시면 족하다는 의미를 드러내는 시제이다. 그렇다면 그 물은 어떤 물인가? 7,37-39을 보면 그 물이 곧 예수님이 주실 성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적인 갈증은 영성가들이 말하는 영혼의 밤이다.

*4,16-18: 사마리아 여인은 육신의 목마름 때문에 예수께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물을 달라고 청했지만, 계속되는 예수님과 대화를 통해 드러난 그녀의 사생활과 질문들을 고려하면 그녀가 육신의 목마름보다 더 근본적이고 깊은 목마름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녀는 이미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다. 이는 그녀가 성적으로 문란해서가 아니다. 하나의 가설은 전 남편들이 모두 죽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사실일 경우 누가 남편 잡아먹는 여자와 결혼하려 들겠는가. 그보다 부당한 소박으로 보는 것이 낫겠다. 그래서 여인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저 살기 위해 현재의 남자와 동거할 가능성이 크다. 결혼법이 유다보다도 더 엄격한 사마리아에서 그 여인은 남자들에게 버림받으면서도 계속 새로운 남자를 찾는 까닭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당대 사회에서 남편은 여자의 보호자였다. 어느 여자가 남편 없이 산다는 것은 보호자의 돌봄이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혼을 당하고 거리에 나앉게 되면 당장 먹고 살 길이 없다. 이혼당한 여자가 어떻게든 살려면 다른 남자의 후처로 들어가거나 몸을 팔거나, 길거리에서 동냥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이혼녀와 미망인은 좀 상황이 다른 듯하다. 형사취수제에 따라 남편의 형제 중에 누군가 거두거나 장성한 아들이 있을 경우 홀어머니를 부양할 수 있었다. 아무튼 사마리아 여인의 처지는 그야말로 최악이다. 그래서 이 여인은 타인의 시선을 피해 땡볕에 물을 기르러 왔다. 이러한 처지를 잘 아시는 주님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으로 새벽부터 서둘러 유다 땅에서 야곱의 우물까지 땡볕 속에 걸어오신 것이다. 복음서를 보면 사마리아 여인과 나눈 대화가 가장 길다. 예수님은 그녀를 따스함과 인내로 대하며 생명의 물을 받아 마시도록 초대하고(4,7) 그릇된 이해를 인내하며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며(4,21) 끝내는 믿음으로 이끌어(4,24.26) 주신다. 그만큼 예수님은 목말라 하는 여인과 가장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며 희망과 구원을 주셨다. 어떤 의미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바로 우리다. 우리 모두는 육신의 목마름, 인간관계의 목마름, 영혼 구원과 관련된 영적 목마름을 느끼며 살아간다.(시편 42,1-3 참조) 한편 예수님은 여인의 남편을 언급하며 그녀의 가장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 주신다. 그것은 신통력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연민과 위로로 그녀의 목마름을 없애주기 위해서였다. 앤더슨 신학 박사는 숨겨진 속뜻을 이렇게 풀이한다. 나는 너를 이해한단다. 너는 가슴 아픈 경험을 무려 다섯 번이나 했구나. 얼마나 네 마음이 뭉그러져 있는지 나는 이해한단다. 지금의 관계도 언제 깨질지 모르기에 네가 얼마나 불안해하는지 나는 알고 있단다. , 불쌍한 딸아. 너는 사랑도 기쁨도 기댈 수 있는 가정도 없구나.”

*4.19: 예수님이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자 예수님의 초월적 능력 앞에서 신앙고백을 했다. 마찬가지로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의 초월적 능력 앞에서 예수님을 예언자로 고백한다.

*4,20: 대화의 주제가 바뀌어 본론으로 들어간다. 이제 여인은 영적인 목마름도 이야기한다. ‘예배를 드렸습니다.’ 과거시제이다. ,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뜻이다. 기원전 128년 그리짐 산에 세운 성전을 유다인들이 부수어버렸기 때문이다. 선생님네는 반드시 예배를 드려야만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동사 반드시(δει) ~해야 한다.’ 삽입. 이러한 강조는 예루살렘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리지 못하는 사마리아인들의 깊은 아픔을 드러낸다.

*4,21-24: 참된 예배를 경건한 사람이 아니라 거시기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르친다. 이제 참된 예배는 지리적 장소를 초월하여 하느님의 영 안에서 이뤄진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신다. 이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느님이 그녀의 아버지임을, 곧 그녀가 무조건적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딸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어 성경을 보면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것이다. ‘은 사마리아인들이 하느님을 유일신으로 알고 있지만, 성경의 일부분만 알고 있었기에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 그들은 예언서와 역사서, 지혜문학을 배척했고, 그 성경 안에 나오는 하느님 섬김에 대한 가르침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과 진리안에서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성령께서 함께 하지 않으면 그 전례는 죽은 것이다. 성령만이 하느님에 관한 진리를 온전히 가르쳐 주신다. 그리고 전례는 두 인격체의 간절한 입맞춤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간절히 영과 진리안에서 예배하는 이들을 찾으시는 것이다.

*4,25-26: 앞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적은 있지만, 당신이 메시아라고 내놓고 말한 적은 없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당신의 메시아 정체를 드러내신다. 이는 예수님이 우선적으로 누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는지, 당신 복음이 우선적으로 누구를 위한 복음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천대받는 사람, 즉 사마리아 여인 같은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 “나다, 너와 말하는 이라고 하심으로써 예수님은 곧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모세에게 계시하신 나다.”라는 표현 방식을 당신 자신께 적용시키는 것이다.(탈출 3,14-15; 요한 6,20; 8,24.28.58; 13,19 에고 에이미)

*4,27: 물동이를 왜 버려두고 갔을까? 여인이 우물가를 떠나 간 곳은 자기 집이 아니라 동네였다. 인간 영혼의 갈증을 풀어주고 구원을 갖고 오신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전한 것이다. 이제 그녀는 육신의 갈증보다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는 생명의 물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제 그녀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수행한다. 사실 선교는 자기 체험에서 우러나야와 한다.

*4,31-34: 제자들은 영적 양식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의 음식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파견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5,19; 5,30; 6,38 참조)

*4,35-38: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수확 때가 온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잘 알려진 속담이었다. 이 말은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하려면 일정 기간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님께는 이 속담이 어울리지 않는다. 당신이 오심으로써 더 이상 파종과 수확이라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 없게 되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의 씨앗을 뿌렸는데, 여인이 신앙을 갖게 됨으로써 같은 날 신앙의 열매를 맺는다.(현재적 종말론) 원문을 직역하면 곡식들이 추수를 위해서 이미 하얗게(레우카이, λευκαἰ)무르익었다.” 곡식은 익으면 누렇다. 그러나 왜 하얗게 무르익었다고 했을까? 예수님이 이렇게 표현한 것은 지금 하얀 옷을 입은 사마리아인들이 당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4,39-42: 사마리아인들의 믿음의 성장. ‘세상의 구원자’(구원의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한 요한만의 표현)는 사마리아인들이나 유다인들을 초월해서 모든 종족을 위해 오시는 분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이 기다려 온 타헤브(=재림하는 자, 종말에 모세의 모습으로 나타날 예언자)’로 고백하거나 또는 유다인들이 기다려 온 메시아로 고백하지 않고 그 이상의 고백을 한 것이다. 이틀 동안 그들이 직접 주님을 체험한 결과이다. 이러한 신앙 고백은 주님 곁에, 주님 안에, 주님 말씀 안에, 주님 사랑 안에 머무는 체험을 할 때 이뤄진다.

*징검다리 본문(4,43-45): 상반된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믿지 않으셨다. 기적만 보고 믿는 것은 언제든 돌아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역시나 6장에 가면 갈릴래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사마리아인들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곧장 왕실 관리 이야기로 넘어가지 않고 중간에 이 이야기를 삽입했을까? 이는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의 믿음을 대조시키기 위해서이다. 사마리아인들에 이어 이방인 출신의 왕실 관리도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일 것이다.

 

3.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시다.(4,46-54)

*이 대목은 갈릴래아 카나에서 이루어진 예수의 첫 번째 표징과 관련을 맺고 있다. ,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을 서두에서 상기시키고, 갈릴래아의 카나에서 이루어진 두 번째 표징이라고 끝에 가서 명시한다. 그리고 첫 번째 표징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를 믿는 자들로 언급되듯이, 두 번째 표징에서는 어떤 왕궁 관리와 그 온 집안 식구들이 예수를 믿는 자들로 소개된다. 그러나 이야기에서는 거의 죽게 된 자를 예수의 말씀만으로, 그것도 먼 거리에서 환자가 아니라 환자 아버지에게 말씀하심으로써 치유가 이루어진다. 마치 공관복음에 나오는 백인대장의 종을 멀리서 말씀만으로 고치는 것을 연상시킨다. 아무튼 이 기적 사화에는 예수의 계시적 말씀이 언급되지 않지만, 예수를 믿고 그 말씀을 받아들인 자에게는 생명이 주어지며 예수 자신이 생명을 줄 수 있는 분으로 시사된다. 물론 이 생명은 죽었던 라자로의 소생(11)처럼 또 다시 죽을 지상 생명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 예수는 신적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음이 계시되며 그 계시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한다.

*지금까지의 구원 경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유다인 니코데모사마리아인들이방인만민 구원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두 번째 표징과 혼인잔치 기적과의 상관성

장소가 같다.

처음에는 기적 행위를 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결국 행하신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기적은 일어난다. 혼인 잔치에서는 일꾼들이, 이번에는 왕실 관리가 말씀에 순종한다.

기적을 목격한 이들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는다.

*첫 번째 기적은 기쁨과 축제의 자리, 두 번째 기적은 근심과 고통의 자리이다. 전자는 가장 행복한 자리, 후자는 가장 절망적인 자리다. 그러나 이 두 자리는 모든 인간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운명의 자리이다. 이런 자리의 주관자는 바로 주님이시다. 어떤 자리이든 주님 뜻에 맞는 해결책이 있다. 그런데 누구든 기쁨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드린다. 그러나 고통의 자리에서 울부짖으며 그 고통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지만, 고통 가운데 함께 아파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4,47: 이방인이고 고위 관리(헤로데 안티파스 측근 관리)이지만 그는 체면을 무릎서고 걸어서 6시간(26Km) 정도 걸리는 카파르나움에서 카나까지 예수님을 만나러 직접 온다. 갈릴래아는 해발 200-300미터 고지대이고 갈릴래아 호수면은 해발 200미터이다. 따라서 카파르나움에서 카나까지 가려면 가파른 길을 허덕이며 올라와야 한다. 기적이 일어난 어제 오후 한 시라는 말은 실제 어제 오후가 아니라 유다인들의 시간 계산법에 따라 오늘 오후를 말한다. 유다인들은 해가 떨어지면 다음 날로 간주했다. 그러므로 왕실 관리는 마차가 아니라 걸어서 저녁 7시 정도에 집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믿었기에 서두르지 않았다. 아무튼 그의 끈질긴 간청과 믿음은 과히 본받을 만하다.

 

우리는 기적에 너무 의존한다. 그러나 믿음의 기초가 기적이라면 그것은 얼마 가지 않아 사라질 것이다. 기적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기적에서 시작될 수 있지만 보지 않고도 믿는믿음으로 성장해야 한다. 아니 십자가를 통해 영광에 이르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 당시 많은 이들이 기적을 체험했다. 그러나 그들이 다 구원받은 것은 아니다. 삶의 변화와 감사함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기적은 의미가 없다. 한편 우리는 일상에서 부지기수로 베풀어지는 기적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평소 우리를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돌보아 주신 하느님, 위험의 길목에 들어가려 할 때 곧바로 빼내어 주시는 하느님께는 감사할 줄 모른다. 그렇지만 위험에 빠져 한참을 허우적거리다 겨우 살아나게 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감사드린다. 아래의 글은 참된 기적의 의미를 말하고 있다.

 

나를 황홀하게 하는 것은

내가 감사하기로 결심할 때마다

감사해야 할 새로운 것들을

매우 쉽게 발견한다는 사실이다.

사랑이 사랑을 낳듯

감사는 감사를 낳는다.

-헨리 나웬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9 강의록 요한 묵시록 주임신부1004 2024.11.22 83
18 강의록 요한 복음 심화 학습 주임신부1004 2024.05.18 78
17 강의록 요한복음 제5강의: 20-21장(종강) 주임신부1004 2024.05.15 72
16 강의록 요한 복음 수난기 주임신부1004 2024.05.13 81
15 강의록 요한 복음 고별사2 주임신부1004 2024.05.13 33
14 강의록 요한 복음 제4강의: 13-19장 주임신부1004 2024.05.13 66
13 강의록 요한 복음 제3강의: 8-12장 1 주임신부1004 2024.04.26 73
12 강의록 요한복음 제2-2강의 1 주임신부1004 2024.04.22 58
11 강의록 요한 복음 제2-1강의 주임신부1004 2024.04.22 67
» 강의록 요한 복음 제1-2강의 주임신부1004 2024.04.16 80
9 강의록 요한 복음 제1-1강의 1 주임신부1004 2024.04.16 67
8 강의록 요한 복음 해제 주임신부1004 2024.04.16 61
7 강의록 탈출기 부록2 주임신부1004 2024.03.21 53
6 강의록 탈출기 부록1 주임신부1004 2024.03.14 137
5 강의록 성경공부 제4강의: 광야에서 만난 하느님과 계약의 백성 주임신부1004 2024.03.10 51
4 강의록 성경공부 제3강의: 이집트 탈출과 해방자 하느님 주임신부1004 2024.03.10 124
3 강의록 성경공부 제3강의: 성조들에게 나타난 하느님 주임신부1004 2024.03.05 143
2 강의록 성경공부 제2강의: 창세기에서 말하는 인간과 신 file 주임신부1004 2024.02.26 84
1 강의록 제1강의: 오리엔테이션 및 성경개론 file 가톨릭부산 2024.02.26 115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