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해제
1. 개요
①주제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임을 사람들이 믿어 “생명”을 얻도록 바라는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우선 나자렛 예수를 신적 영역에서 인간 세계로 파견된 하느님의 아들로서 명확하게 제시한다(3,16;10,10). 즉, 하느님의 계시자로서 예수의 신적 선재(先在)를 내세워, 예수는 “육신”이 되어 인간세계에 거처한 영원한 “말씀”(Logos)이요,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같은 분이라고 선포한다. 이 예수는 인간 세계에서 아버지 하느님과 일치된 “일”을 행함으로써 (5,17.19;10,30) “영광”을 드러내면서도(17,4) 수난을 겪지만 “생명”의 근원이요(11,25-26;14,6), “세상의 구원자”로 계시된다(4,42).
공관복음에서 볼 수 없는 예수의 활동장소나 지리적 여건이 요한복음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또 예수의 활동상과 수난기가 공관복음보다 드라마틱하게 묘사되어 있는 점도 특징이다.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에 관한 역사적 전승에 터를 두고서 예수의 지상사건들을 신학적으로 심도 있게 각색해 보도한다. 한마디로 요한복음은 깊은 신학사상이 반영된 복음서이다.
2. 종교사적 배경
①유다교와의 대립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과 대조적으로 “유다인들”이란 표현이 많이 나온다. 주로 예수와 제자들에 대한 대립적 적대관계의 맥락에서 나온다(5,16.17;7,1). 유다 최고의회 의원들을 가리킬 때 “통치자들”이란 표현도 사용되지만(7,26.48;12,42),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의 여러 지도층을 총칭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바리사이”란 표현도 몇 군데 있지만 공관복음에 나오는 “율법교사”, “원로”, “사두가이”란 표현은 전혀 없다. 바리사이파 사람들만 별도로 언급된 것은 요한복음이 씌여질 당시 그들의 영향력이 막강했음을 시사한다. 아무튼 “유다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불신하거나 배척한 자들로서 당시 민중들로 하여금 예수의 제자들에게 대적하도록 이끄는 장본인들을 총칭한 말이다. 유일신 사상에 익숙한 유다인들로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7,27.41-41;12,34). 신성모독으로 보였기 때문이다(5,18;8,58-59;10,30-33;19,7). 유다인들이 처음부터 예수를 죽이고자 한 것으로 보도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이것은 “회당에서의 추방”(9,22;12,42;16,2)과 함께 회당을 중심으로 한 유다교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첨예한 대립을 강하게 시사한다. 예컨대, 유다인들과 논쟁을 벌이는 예수의 대담(8,12-59)을 위시하여 유다인들의 축제나 풍습에 거리감을 두는 표현들(2,6.13; 4,9; 5,1; 7,2; 11,55; 18, 20;19, 40.42), 모세의 지위 격하(1,17; 3,13.31; 5,20; 6,46; 7,16), 모세의 제자와 예수의 제자 구분(9,28), 유다인들의 율법이라 칭하는 예수의 표현(8,17; 10,34; 15,25), 유다인들은 “악마의 자식들”로서 하느님으로부터 비롯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8,44.47)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에 죄악 속에서 죽게 되리라는 냉혹한 표현(8,24;9,41), 유다 민족에 속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표현(3,3-7), 하느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갈 필요는 없다는 표현(4,21-24), 유다인들의 성서는 오히려 예수를 증거하고(5,39) 모세는 그들을 고발하리라는 표현(5,42) 등이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에 대한 요한복음 저자의 태도는 대립적 상황에서 호교론적이요 또한 논쟁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구세사가 유다민족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는다. “유다인”과 구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칭호가 명예롭게 사용되고 있으며(1,31; 47.49; 3,10; 12,13), 유다인들로부터 오는 구원(4,22)과 예수를 믿게 된 유다인들에 대한 언급(8,31; 11,45; 12,11)도 있다.
②반영지주의 경향
요한복음은 당시 영지주의(그노시스즘)에 물든 이단자 체린투스와 그 무리들의 오류와 사조에 대항하여 호교론적 입장에서 엮어진 것이라고 2세기경 이미 이레네우스가 언급한 바 있다. “예수는 참으로 하느님도 사람도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영지주의 그리스도론, 곧 “가현설”에 맞서 요한복음은 “말씀이 사람(=살)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는 육화 신비를 선포한다. 육화는 선재한 “말씀”(로고스), 곧 그리스도는 지상으로 파견되어 물질계에 속한 “육”을 취함으로써 인격의 실재성과 역사성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육”을 취한 그리스도가 인간 구원을 위한 “생명의 빵”이 되고, 십자가상 피 흘린 제물이 됨으로써 구세주의 역사적 실제성을 드러낸다.(사도신경의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가현설 반박 흔적, 영지주의는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지 않으셨다는 단성론의 일종이다.) 또한 “살이 되신 그리스도”는 영지와 환시를 통해 하느님과 직접 통교할 수 있다는 영지주의 주장에 대한 신앙적 답변이다. 또 영지주의는 세상을 선악의 투쟁의 결과물로 인식하는 이원론을 주장하는데, 요한복음은 “세상”은 하느님과 로고스에 의해 창조되었고(1,1.3), 그 “세상”은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말(3,16)도 “세상”을 죄악시 하는 영지주의 사고를 뒤엎는 것이다.
③세례자 요한의 종파에 대한 호교론적 입장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비해 세례자 요한에 대한 언급이 적고,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자로만 그를 묘사한다. 그리고 예수의 공생활이 공관복음에는 세례자가 감옥에 갇힌 이후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 데 반해, 요한복음에서는 세례자와 경쟁이라도 하듯 예수는 유다지방에서 세례를 베풀고 세례자는 그 자리를 피해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가 세례를 베풀고 활동하는 것으로 묘사된다(3,22-30). 이는 당시 그리스도인들과 세례자 요한 추종자들(3,25)의 다소 원만치 못한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특히 서장에서 요한은 “빛”이 아니라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이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보다 먼저 등장했기 때문에 예수보다도 우위라고 믿고 따르던 자들이 당시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상황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유다인들과 논쟁을 벌였다는 대목(3,25)이나 세례자 요한의 세례만을 알고 있던 공동체가 이미 에페소에 있었다는 대목(사도 19,1-17)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요한복음이 씌어질 당시 세례자 요한 종파가 세례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는 사실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3. 저자와 책명
요한복음 저자는 교회 전통상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라고 한다. 이 전통은 2세기경부터 문헌상으로 유지되어 왔다. (리옹의 주교 이레네우스의 증언과 「무라토리 경전목록」 참조) 특히 이레네우스의 증언은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르푸스의 가르침에 의존했고, 폴리카르푸스는 “요한”이나 “주님을 목격한 자들”과 함께 살며 그들로부터 “생명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이다. 그러나 저자가 사도 요한인지는 문헌상 확실하지가 않다. 일부 학자들은 이레네우스가 사도 요한과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가 말한 “원로 요한”을 혼동했다는 에우세비우스의 견해를 따르기도 한다. 게다가 공관복음서(마르 1,19; 3,17;9,38:10,35-37, 루카 9,54)와 사도행전(4,13)에 언급된 사도 요한의 성품과 자질로 봐서 이렇게 깊은 신학사상이 담긴 심오한 복음서를 기술했으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그래서 오늘날 “요한복음서” 대신 “제4복음서”라는 책명이 선호되기도 한다.
요한복음 저자에 관한 가장 명확한 언급은 21, 24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제자”는 “애제자”를 가리킨다. 물론 이 언급은 저자 자신의 말이 아니라 21장을 추가한 후대 어느 편집자의 말이다. 아무튼 애제자는 중요한 예수 사건(최후만찬, 수난, 죽음, 부활)을 체험한 제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애제자를 사도 요한과 동일 인물로 볼 수 있는가? 이도 아직 찬반 논쟁 중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요한복음의 전통성은 사도 요한이 직접 기록했는지 여부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설사 사도 요한이 직접 쓰지 않았으면 어떠하랴?
요한복음 본문을 보면 저자는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와 그리스어에 능통했다. 아마도 팔레스티나 출신으로서 그리스어권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따라서 에페소에서 활동한 사도 요한으로 여겨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사도요한이 애제자인지는 문헌상 확실하지 않으나 분명한 것은 ‘애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복음을 집필했다는 것이다. 애제자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들을 상기하고 믿음으로 증언한 원래 전승자요, 그 제자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 복음서(1-20장)을 집필했을 것이고, 후대에 또 다른 제자가 부록편(21장)을 가필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요한복음은 “애제자”의 후계자 공동체(요한 학파)에 의해 이른바 사도전승에 따라 전경이 된다. 그리고 “애제자”란 표현은 당시 공동체에 의해 복음서의 원래 전승자 또는 저자(사도 요한일지도 모름)를 존경하는 칭호로 사용되었다. 아무튼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의 친서 여부를 떠나 교회는 적어도 사도전승을 따른 정경의 차원에서 사도 요한의 권위를 계승한 복음서로 볼 수 있다.
4. 집필 장소와 연대
학자들은 요르단 강 건너편 동부 지역, 특히 영지주의적 배경 아래 시리아(안티오키아), 요한복음일 일찍부터 알려진 곳으로 여겨지는 이집트(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전통과 종교사적 배경 아래 소아시아(에페소) 등을 거론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회 전통에 따라 에페소로 본다. 또한 에페소로 보는 이유는 에페소에 있는 강력한 유다인 공동체(사도 18,19.24-28; 19,8-20 참조)와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들(사도 19,1-7)과 회당과의 대립 상황(묵시 2,9; 3,9 참조) 등이 요한복음 내용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집필 연대는 일반적으로 1세기 말(90~100년) 또는 저 늦게 2세기 초(100~110년 또는 140년)으로도 추정한다. 직접적인 저자일 수 있는 사도 요한이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98~117년)의 초기까지 살았다는 교부들의 증언과 80년대 후반에 성행했던 “회당 추방”이란 복음서 자체의 표현 때문이다. 또한 2세기 초 출판된 이집트에서 발견된 복음서 단편(18,31. 33. 37-38)들이 110년에서 130년 사이에 기록되었다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리적으로 학자들이 추정하는 연대는 90~100년이다.
5. 구조
그러나 두 부분이 따로 엮인 것이 아니다. 제1부에서는 예수의 “영광” 또는 “시간(=때)”, 곧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이 예시되고, 예시된 그 내용이 제2부에서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즉,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의 관점에서 지상 예수의 계시적 말씀과 행적이 순차로 서술된다. 이런 관점이나 서술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얻도록 바란다.”는 저술의 동기와 목적(20,30-31)에도 부합된다. (이상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이영헌/분도 출판사. 요약 정리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