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강의 : 실패와 배신을 통해 하느님의 백성으로 변화되는 이스라엘
“광야”란 하느님께만 의지하는 곳, 하느님의 백성으로 단련 받는 곳이다.
단련을 받는다는 것은 시간만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시련과 고통이 동반됨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나의 낫을 만들어 가는데도 불의 단련을 받아야 한다. 뜨거운 불, 차가운 물을 번갈아 가며 단련 받은 낫이나 칼은 그 어떤 것도 베어낼 만큼 날카롭고 강하게 변화된다.
광야란 바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어려움 중에서도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듭 태어난 곳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곳, 그들의 한계를, 부족함을 깨달은 곳이다.
탈출기 안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를 함께 걸어보며 그 안에서 체험되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시며, 이스라엘은 어떤 모습으로 응답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탈출기를 통해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능력이나 이스라엘을 죄를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어떤 분으로 고백되는지, 그 하느님 앞에선 이스라엘은 어떤 존재인지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1. 광야에서 체험하는 하느님의 손길 (성경 뒤편 지도 참조)
1) 갈대바다의 기적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그들의 광야생활이 시작된다.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의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큰 위기가 닥친다. 맏배들의 죽음에서 벗어나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도 잠시 이집트 추격꾼들의 추격에 겁을 먹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앞에는 큰 바다, 갈대 바다가 가로막고 있으니 바다에 빠져 죽든가 아니면 이집트로 다시 붙잡혀 가든가 진퇴양난의 순간이 다가온다.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어 광야에서 죽으라고 우리를 데려왔소?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렇게 만드는 것이오? ‘우리한테는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으니,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우리를 그냥 놔두시오’ 하면서 우리가 이미 이집트에서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소?” (탈출 14,11-13)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의 큰 능력을 체험하고도 다시금 모세에게 투덜대며 하느님께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때 믿음의 인간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두려워하지들 마라. 똑바로 서서 오늘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루실 구원을 보아라. 오늘 너희가 보는 이집트인들을 다시는 영원히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워 주실 터이니, 너희는 잠자코 있기만 하여라.”(14,13-14)
믿지 못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세는 믿음을 가지라고 촉구한다. 이러한 믿음 위에 하느님께서는 큰 능력을 보여주신다. 광야 생활의 첫 순간에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임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뒤이어서 하느님의 갈대 바다에서의 기적, 큰 능력을 체험한 이스라엘은 기쁨에 겨워 자신들을 구해주신 야훼 하느님을 찬양한다.
탈출 15,1-19 에 나오는 모세의 노래(부활성야 제3독서 후 노래함)는 단순히 갈대바다의 기적을 보고 노래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기억되는 큰 사건으로서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한 이들은 언제나 감사를 드려야 함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2) 마라의 기적
갈대바다에서 하느님의 큰 능력을 체험한 이스라엘은 수르 광야로 나가게 된다.
며칠 동안의 행군 중에 그들은 물을 찾지 못해서 목마름의 시련을 겪게 된다.
애써 마라에서 물을 찾아내지만 광야의 물은 소금기가 많아 쓴 물이었다.
또 다시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대든다. “우리가 무엇을 마셔야 한단 말이오?”
모세의 부르짖음은 하느님은 쓴 물을 단물로 바꿔주시고 그곳에서 백성을 위한 규정과 법규를 세우시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을 잘 듣고,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며, 그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모든 규정을 지키면, 이집트인들에게 내린 어떤 질병도 너희에게는 내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낫게 하는 주님이다.”
3) 만나와 메추라기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온 지 한 달째 되는 날 씬 광야에 이른다. 이제 또 다른 위기인 먹거리에 대한 불평이 쏟아진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회중을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16,3)
이 불평이 인간이 지닌 본래의 한계성을 보여 준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은 하지만 어려움이 닥치거나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시련이 다가오면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이 일기 마련이다. 이러한 불평에 하느님은 메추라기와 만나를 내려주셨다.
메추라기가 이동하는 때와 겹쳐 쉽게 잡을 수 있다거나, ‘만 후’(이게 무엇이냐)라는 이름으로 자연현상과 더불어 생기는 ‘만나’라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자연현상을 이용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먹거리를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모두 이것을 하느님께서 해주신 일이라 믿었던 것이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단순한 먹거리가 아닌 하느님의 음식이기에 만나를 먹을 때 지켜야 할 사항이 있었다.
❶ “저마다 먹을 만큼씩” 거두어들이라는 명령 (16,16)
이스라엘 백성이 시키는 대로 하니 많이 거두어들이는 사람이나 적게 거두어 이는 사람이나 모자라지 않았고 결국 저마다 먹을 만큼씩 거두어들였다고 전한다.
❷ “먹고 남은 것을 그 음 날을 위해 남겨 두지 말라”는 명령
이 말을 따르지 않고 남겨 둔 것에서는 구더기가 꾀고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침마다 먹을 만큼씩만 거두어들였다. 그 나머지는 햇볕에 녹아 버렸다. 결국 모든 것은 하느님께 맡기고 오직 신뢰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무엇을 먹을까 걱정말아라)
❸ 마지막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분을 거두어들이고 이레째 날에는 쉬라는 명령
여섯째 날에 거둔 것 중에 남겨 둔 것은 썩지 않았고 구더기도 끓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에 편히 쉬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❹ 그와 더불어 만나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요 자신들을 죽음에서 구한 생명의 음식임을,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먹여 살린 이 양식을 자손들이 잊지 않고 기억하도록 ‘만나 한 오메르’를 항아리에 가득 채워 야훼 앞에 보관하라는 명령이 주어진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 40년 내내 만나를 먹었다는 것은 광야 생활 내내 하느님의 자비로 살아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먹을 것이라는 일상적인 것을 통해 하느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신기한 사건만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사 안에서도 당신 도움의 손길을 주심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하느님의 손길이고 도움임을 믿고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한 것이다.
✒신기한 기적만을 쫓는 신앙생활은 잘못이다.
4) 마싸와 므리바의 물
이스라엘이 씬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또다시 마실 물이 없어 모세에게 시비하였다. “우리가 마실 물을 내놓으시오” 모세가 무슨 잘못인가?
이 때 모세는 이야기한다.
“어째서 나와 시비하려 하느냐? 어째서 주님을 시험하느냐?” 그들이 또 대든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왔소? 우리와 우리 자식들과 가축들을 목말라 죽게 하려고 그랬소?”
모세가 하느님께 기도한다. “이 백성에게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제 조금만 있으면 저에게 돌을 던질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 의탁하는 모세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와 목마름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은 마실 물을 얻게 되었다.
17,7 에 보면 이곳 이름의 유래가 나온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 시험하였다 해서, 그곳의 이름을 ‘마싸와 므리바’라 하였다”
그런데 하느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이 투덜거리기 전에 투덜거릴 여지 자체를 없애 주시지 않았을까?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없다고 불평하기 전에 바위에서 샘이 흐르게 하고, 고기 타령을 하기 전에 메추라기가 날아오게 하지 않으셨을까?
이 질문에 우리가 답을 구해보자. 우리의 삶 안에 아무런 고통이나 불만이 없다면?
만일 가는 곳마다 모든 것이 흡족하게 마련되어 있었다면 그들이 과연 그것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알고 감사했을까? 모든 것이 제 복인 양 여겼을 것이다.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잘 되면 내 탓이고, 잘못되면 조상탓이라고...
이러한 모습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을 원하시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이며, 바로 고통을 극복함에 있어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며 노력하는 것이 신앙이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겪은 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의미를 밝혀준다.
“너는, 마치 사람이 자기 아들을 단련시키듯,
주 너의 하느님께서 너를 단련시키신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알아 두어야 한다”(신명 8,5)
어떤 처지에서든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이스라엘이 광야를 거쳐야 했던 것이 아닐까? 광야는 인간이 자신의 무력함을 체험하고, 생명의 하느님을 찾으며 그분의 자비를 갈망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그래서 광야는 위험한 장소일 뿐 아니라 하느님을 아주 가까이 체험할 수 있는 장소인 것이다.
앞서 살펴본 물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부족해서 하느님께 투덜거린 것에 대해 하느님께 대한 불신앙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만일 불신앙이고 하느님께 대한 반역이었다면 하느님께서는 그에 합당한 벌과 심판을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불평에 답하시며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 주셨다. 왜 그런가?
그것은 욕심이나 불신에 의한 불평과 요구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이기에 야훼 하느님께서 그들 삶에 직접 개입하시어 도와주신 것이다. ‘반역의 불평’이 아니라 ‘호소의 불평’이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하느님께 의지하며 청한다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어서 17,8 에는 아말렉과의 전투가 전해진다.
여기서 갑자기 여호수아가 등장하고 있다. 또한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승리하고 그렇지 않으면 패하는 모습이 전해지는데 이는 곧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능력을 주시는 것이라 여길 수도 있으나 아말렉과 주님, 하느님의 전투였음을 인지시키는 사건이다.
2. 이스라엘 민족의 하느님에 대한 배신 : 금송아지 사건
금송아지 사건은 하느님의 자애로운 계약에 올바로 응답하지 못하는 인간의 허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앞서 보았던 이스라엘의 불편과 요구 등은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이었다면 금송아지 사건은 하느님께 대한 배신의 행위, 우상 숭배와 연관된 내용이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의 계약을 맺으며 여러 율법 조항을 전해 받는 동안, 그 기일이 40일이라는 시간이 되자 백성들은 모세가 오래도록 산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론을 통해 자신들의 신을 만들어 달라고 청한다.
이에 아론이 금붙이를 모아 수송아지 상을 만들자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라고 백성들이 외친다.
우리는 이미 파라오가 야훼의 이름을 몰랐다는 대목에서 하느님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신에 속하지 않는 분이며, 그분이 이름을 알려주셔야만 우리가 알 수 있는 분으로 우리의 생각과 이성을 넘어서는 분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어찌 수송아지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 하느님의 모습일 수 있는가?
아담이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의 마음으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죄의 기원이 이루어졌듯이, 하느님을 우리가 알고 있는 방법으로 그 모습을 만들어 내려는 교만의 마음이 우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어 해 보자.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간혹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행해 주기를 바란다.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지만 실상 우리의 속마음을 “나의 뜻이 땅에서와 같이 하늘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이지 우리의 모습을 닮은 하느님이 아니다. 우상이란 우리가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나를 변화시켜 살아가지 않고 나의 뜻에 따라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고, 내가 원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것이 우상이다.
우상을 섬기는 전형적인 모습을 우리는 아론의 모습에서 본다.
백성들이 자신들을 이끌 신을 만들어 달라고 아론에게 청하자 자기 자신이 창조주인양 금붙이를 모아와 신상을 만들어 버린다. 대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을 망각하고 자기가 최고라는 교만과 하느님께 제사드려야 할 봉사자가 아니라 섬김을 받으려 하는 욕심에 우상은 비롯되는 것이다. 우상은 공경받으셔야 할 하느님의 자리에 자신의 욕심이 놓일 때 만들어진다.
또한 수송아지 상을 만들어 놓고 “내일은 주님을 위한 축제를 벌입시다”라고 말하는데 하느님이 원치 않는 일을 하면서 자신들은 주님을 위한 축제를 벌인다고 한다. 우리들의 삶 안에서도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면서 그것을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지, 내 욕심에서 행하는 것이면서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닌지... 바로 이것이 내 욕심에서 빚어지는 우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상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어떤 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섬겨야 할 하느님의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서는 것. 돈, 명예, 권력 등
내 욕심에 의해서 행하는 것이면서 하느님의 이름을 붙이는 것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그에 합당하게 살아가겠노라고 결심한 사람이다. 아니 그러한 삶을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끊임없이 다가오는 우상에의 유혹을 이겨내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우리는 다시 광야로 나아간다.
우리가 의지하고 기대야 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바램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해 인도하시는 길을 걸어야 한다.
하느님께만 의지하고 하느님의 뜻을 알고자 노력하는 것이 광야임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시간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살아보도록 하자.
제 4 강의 : 십계명 - 계약의 하느님
0. 탈출기 후반부는 계약과 성막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주제에 집중된다.
* 19-24장 : 시나이 계약의 체결과 이에 관련된 율법의 하달
* 25-31장 : 성소와 사제직에 관한 규정들
* 32-34장 : 계약의 갱신
* 35-40장 : 성막의 건설
0. 시나이 계약은 모세오경의 정점이다.
천지창조부터 이제까지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의 모든 통교와 관계가 이 계약으로 요약되며, 선택된 민족의 장래가 이 계약으로 방향을 잡는다. 시나이 계약은 하느님이 노아,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분은 이제 한 개인이나 씨족이 아니라 민족 전체와 계약을 맺으신다.
0. 이스라엘이 시나이산 밑에서 지낸 세월은 겨우 일 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다루는 부분은 모세오경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참조. 탈출 19-40장, 레위기 전체, 민수 1-10장)
모세오경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계약이라는 단어 ‘베릿’(berit)은 성경 전체에서 287회 사용되었다.
성경을 구분할 때도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구분하듯이 “계약” 혹은 “약속”이라는 단어는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가장 중요한 단어이기도 하다.
이집트 탈출의 목적이 “하느님 백성으로서 하느님께 예배드리기 위함”임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계약이란 의미를 새로이 정립할 수 있으리라 본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새로이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두 번째 창조의 의미인 “하느님 백성의 창조”라고 한다면 계약은 바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를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길을 하느님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계약은 시나이라는 특별한 장소에서 처음으로 내려진 것이 아니다.
이미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의 연장이며, 성취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이집트의 억압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은 종살이의 쓰라린 체험을 기억하면서 궁극적으로 이집트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사회, 새 공동체를 향해 나아간다.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잘 표현한 구절이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19,4)이다.
독수리 어미는 제 새끼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줄 때, 새끼를 등에 태우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갑자기 떨어뜨린다. 그러면 새끼는 추락하지 않으려고 날개 짓을 한다. 서투른 날개 짓으로 파닥거리다 지치면 지상을 향해 곤두박질 친다. 그러면 언제 나타났는지 다시 어미가 날아와 새끼를 등에 태우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그 동안에 새끼는 어미 등 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원기를 회복한다. 어미는 높은 곳에서 또다시 새끼를 떨어뜨리고 새끼는 바둥거리며 날개짓을 하다가 자유롭게 나는 법을 터득한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노예살이를 하던 중에 계약을 맺자고 제안하시지 않고 그들을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키고 광야의 시련을 거쳐 자유로운 백성을 만들어 놓은 다음에 계약을 맺으신다.
먼저 이집트 탈출이라는 해방을 이루시고 광야에서 돌봐주신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집트 탈출이라는 체험을 영원히 기억하면서 새로운 사회의 기반이 될 길을 알려주신다. 아울러 그 길을 보증해 주는 뜻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독특하고 특별한 관계, 계약을 맺으신다.
창세기에서도 노아(9,8-7), 아브라함(17,1-14)과 맺은 계약이 소개되었지만, 이스라엘이 야훼의 백성이 되고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는 시나이 계약이야말로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공동체로 자리 잡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라 할 수 있는 계약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야훼의 뜻과 이스라엘의 응답으로 이루어졌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탈출을 통해서 야훼의 현존을 체험했고, 이에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우리가 실천하겠습니다”(19,8) 라고 응답함으로써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 이로써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하느님과의 계약의 유대관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계약의 바탕은 이스라엘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다. 노아의 방주에서, 금송아지 사건 이후 모세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인간들의 죄 앞에서 노아와 모세의 간절한 청에 의해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인간을 용서하시는 것이다.
(하느님 계약의 특성 = 먼저 사랑하시는 하느님 / 예수님께서도 먼저 십자가를 지신 다음 그 길을 따르라고 하셨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계약을 체결하기에 앞서서 어떤 조건을 내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이집트에서의 해방과 광야에서의 보호를 통해 해방자이시며 보호자로서 당신을 보여주신 다음, 그러한 당신의 백성으로 살기를 요구하고 계신다. 당신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계명과 법규들을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이러한 노력의 결정체가 “율법”이라는 것으로 나타난다. 바로 율법의 준수가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말이다. 그렇기에 율법은 단순히 우리가 지켜야 할 법 규정만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이 살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방향이며, 지침인 것이다.
이 계약과 법 규정을 자유로운 상태에서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가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집트 탈출과 시나이 사건은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야훼의 자아계시이며, 이를 받아들이는 백성의 자기 개방이다. 바꾸어 말하면, 계약체결을 통해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함께 살아갈 것을 약속하며, 그 약속의 삶에 합당하도록 윤리적 규범이 제시되는데 그것이 십계명이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인들에게 알려 줄 말이다”(19,5-6)
위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느님 말씀의 실천 및 준수가 계약백성 또는 거룩한 백성의 조건이 됨을 하느님께서 선포하고 계신다. 이러한 계약 준수에 대한 지침은 야훼 하느님의 법적 요구 혹은 강제적 지침이 아니라 야훼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구원 은총에 대한 보답의 요구이다. 다시 말하면, 시나이 계약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이 계약을 충실하게 지키면 하느님의 특별한 소유가 된다는 사실에 있다. 여기서 사용된 ‘소유’로 번역된 히브리어 ‘스굴라’는 원래 보석처럼 임금에게 속한 귀중품을 뜻한다. 이어서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는 구절은 계약을 잘 지키면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신다는 말씀이며,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 복이 주어질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안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2-3).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만민 구원을 위한 하나의 표본이 디는 것이다. 우선적이 선택!!
하느님과 계약을 맺기 위하여 옷을 빨고 몸을 정결하게 유지한 백성들은 시나이산 기슭에 섰다. 하느님은 모세를 통하여 ‘열 말씀’을 백성에게 내리셨다. 탈출 20장에 나오는 이 ‘열 말씀’은 시나이 계약의 핵심 부분으로 뒤이어 21-23장에 나오는 계약 법전의 기초가 된다. 이 ‘열 말씀’을 일반적으로 우리는 ‘십계명’이라고 부른다. 하느님께서 기본이 되는 계명을 열 가지로 제한하신 것은 열 손가락으로 수를 세는 어린이들까지도 쉽게 배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열 말씀은 ‘~하라’는 명령과 ‘~하지 마라’는 금령으로 이루어져 있다.
십계명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말씀은 첫 번째 말씀이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 하느님이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된다”(탈출 20,2).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이나 금령을 내리기 전에 먼저 그들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다. 따라서 이어지는 하느님의 명령이나 금령들은 모두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인 셈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십계명에서는 하느님이 먼저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이 중요한 말씀이 빠져있다. 금령이나 명령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십계명하면 먼저 그것을 어기면 벌을 받는다는 생각이 앞서게 되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우리가 짚어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해주신 은혜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 인간의 응답이 이어져야 하는데(보답적 응답), 인간의 계명 실천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하느님의 은혜가 주어진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을 보고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한다.
0. 시나이 계약의 핵심 = 십계명(66-69P 참조)
탈출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우리에게 전해지는 ‘시나이 계약’은 두 단락으로 전해지고 있다. 첫째 단락은 19-24장에 나오는데, 하느님의 현현(나타나심), 계약조건(십계명과 기타 규범)의 제시, 백성의 동의와 계약체결로 이어진다. 둘째 단락은 32-34장에 나오는 것으로, 이스라엘이 저지른 계약 파기, 모세의 중재, 하느님의 재계약 등이 소개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십계명이다. 십계명은 열 마디 말씀(Decalogos)라는 희랍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열 마디 말씀’이라는 표현이 탈출기 20,1-17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신명기 4,13에 ‘십계명’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5,7-21에 그 말씀이 ‘두 돌판’에 새겨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탈출기에서도 ‘십계명’이라는 표현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0. 십계명은 야훼 하느님과 인간과의 수직관계와 인간 상호 간의 수평관계가 밀접하게 짜여있다. 그렇게 보면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이중계명(마르 12,29-31)을 구약의 개념으로 설명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다르게 표현해 본다면 십계명의 모든 내용은 나 혼자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더불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창조 때의 보시니 좋은 삶을 위한 하느님 백성의 삶에 대한 지표임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다.
십계명으로 표현되는 열 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째 부분은 유일신 공경에 관한 가르침이고 둘째 부분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관한 가르침이다. 그런데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룬 둘째 부분은 간략하게 제시되는데 반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다룬 첫째 부분은 장황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이것은 유일신 하느님에 대한 공경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왜 유일신 공경이 그토록 중요했을까?
고대 근동의 신들, 곧 풍요다산신 숭배에는 현대인들의 기분으로 보아도 신전 안에서의 종교적 간음이라든가 유아 제사 등 불건전하고 반윤리적인 행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유일신에 대한 올바른 공경은 불건전한 다신교 풍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로 통했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로운 열 말씀 가운데 이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강조하신 것이다.
0. 더불어 십계명은 성막과 더불어 하느님 현존을 드러내는 주요 표지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만남의 천막 안 깊숙이 성소를 차리고 이 성소에 십계 석판을 넣은 계약의 궤를 안치하였다.
십계명에 이어지는 계약 법전(21-23장)의 내용은 고대 근동에서 널리 통용된 민법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십계명을 일상의 삶 안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는 세부 규정이라 할 수 있다.
0. 탈출 24장은 계약의 완결을 뜻하는 두 가지 의식을 묘사하고 있다. (피 뿌림과 만찬)
백성들이 주님의 열 말씀과 계약 법전에 대해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라고 온전히 동의하자, 모세는 제단과 백성들에게 짐승의 피를 뿌린다. 이것을 통해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는 계약 완결이 선언된다. 그러고 나서 모세와 아론과 백성의 대표 72명의 원로들은 주님과 함께 계약의 만찬을 나눈다. 이처럼 계약 체결과 율법 준수가 엄숙하고 경건한 예식 가운데 이루어졌다고 전함으로써 탈출기의 저자는 계약과 율법이 이스라엘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정립하는 근본 토대요 모든 종교적 규정의 원천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그렇기에 십계명에 대한 대략적인 성찰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신앙인으로서 내 삶을 한번 돌아보는 것도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 죄에서 탈출하는 새로운 파스카의 삶을 살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본다.
이상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이 세상은 하느님 보시니 좋은 세상으로 창조되었고, 인간에게 복을 주기 위한 것이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인간은 하느님의 복을 받지 못하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 다시금 인간을 불러주시어 창조 때의 좋았던, 보시니 좋은 모습으로 돌려놓고자 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그러한 좋은 의도도 인간의 응답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선적인 선택을 통해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의 후손들과 영원한 약속을 하신다. 그 약속의 결정체가 시나이에서 맺게 되는 시나이 계약이며, 계약의 백성으로 살아갈 기본적이 지침이 우리가 알고 있는 십계명이라 할 수 있겠다.
<참고>
탈출기에 보면 34,10-26에도 법규형식을 띤 12개의 계명이 수록되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십계명이 살인, 간음, 도둑질과 같은 윤리적 성격의 계명이라고 한다면, 뒤에 나오는 것은 축제에 관한 규칙이라고 할 수 있다.
1. 다른 신에게 경배해서는 안된다.
2. 너희는 신상들을 부어 만들어서는 안된다.
3. 너희는 무교절을 지켜야 한다.
4.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맏배를 바쳐라)
5. 이렛날에는 쉬어야 한다.
6. 주간절(초막절)을 지켜라.
7. 추수절을 지켜라.
8. 모든 남자는 1년에 세 번 주 하느님, 곧 이스라엘 하느님 앞에 나와야 한다.
9. 희생제물의 피를 누룩 든 빵과 함께 바쳐서는 안된다.
10. 파스카 제물을 이튿날 아침까지 남겨두어서는 안된다.
11. 맏물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바쳐라.
12.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에 삶아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