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카복음 16,19-31
오늘 복음은 극명하게 서로 대칭되는 두 사람의 얘기가 나옵니다.
<부자와 라자로>, 두 사람의 종교적, 도덕적 삶에 대해서는 말이 없습니다.
다만 한 사람은 지극히 가난했고 다른 사람은 날마다 잔치상을 차릴만큼 호화스런 생활을 했다고만 알려줍니다.
옛말에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요?
한데, 현세에서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을 주워먹을 만큼 가난에 찌들린 삶을 산 이의 이름만 <라자로>라고 복음은 들려줍니다.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부귀영화를 누린 이는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 얘기 하나가 들려드리지요.
어떤 젊은 순례자가 긴 여행 끝에 현자 '아부 야디드'가 사는 마을에 와서 현자에게
"보다 확실하고 빠르게 하느님께 도달하는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하였습니다.
아부 야디드가 "온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여라."라고 대답하자 젊은이는 "이미 하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다른 이로부터 사랑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하라." "왜요?"
"하느님은 사람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시는데 너의 마음을 찾아 오셨을 때 하느님을 향한 너의 사랑을 보시고 기뻐하실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하느님께서 다른 이의 마음속에 새겨진 너의 이름을 보신다면 분명히 그분께서는 너를 더욱 더 큰 애정으로 바라보실 것이다."
이제 복음 구절들을 좀 더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난한 이가 대문 앞에 와서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불리는 일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부자들은 기름진 고기를 먹고 빵으로 손의 기름을 닦아 내 던지고 굶주린 이는 그것으로 배를 채우려 했던 것입니다.
부자가 라자로란 이름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가 라자로를 미처 보지 못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보고 또 보아도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드린 청을 아브라함은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답합니다.
그 부자의 형제들 역시 같은 식의 삶을 살고 있어서 죽은 사람이 살아서 찾아간다고 해도 듣고 또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할 것은 뻔하다는 것입니다.
텔레비젼, 신문에서 재해 소식을 접하고도 내 삶의 방식과는 전혀 무관한 사실로 받아들이지는 않는지 자문해 볼 일입니다.
아니, 멀리 갈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가슴 아픈 일들, 가난한 이들을 보지 않고 듣지 않으려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지는 않는지요?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이 싫으니까요.
오늘 복음의 부자는 보지만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픔을 보고서도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지 않을 만큼 굳어져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셨다."란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원문의 의미는 좀 더 강합니다. "애간장이 탄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 앞에 예수님의 마음은 녹아내립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이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생의 마지막 날에 우리는 행하거나 행하지 않은 우리의 사랑에 대해 심판받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참조)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마음으로 귀기울이는 것을 배워야겠습니다.
그 은혜를 주십사고 청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