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20,1-9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맨 먼저 만난 사람은 누구입니까?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4복음서에서 전해주는 부활사화는 조금씩 다르지만 한결같이 첫 목격자는 이 여인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첫머리에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1) 라고 전합니다.
다른 세복음서도 마찬가지로
"새벽 일찍이" "첫날이 밝아올 무렵" ‥. 이라고 전합니다.
누가, 무엇이 그녀를 이리 서두르게 했을까요? 어쩌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무엇 때문에요? 라고 묻는 것은 어리석겠지요?
막달레나, 예수님의 조건없는 용서를 받은 이, 결코 지워지지 않을 사랑의 체험으로 새로 태어난 이!
잘못된 사랑을 찾아 헤매던 이가 차원 다른 사랑을 찾았습니다.
이 사랑이 그녀를 서두르게 했습니다.
어떤 두려움이나 망설임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1요한4, 18)
그래서 그녀는 이른 아침 무덤에 갔고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도둑 맞았다고 생각하며 사도들에게 알립니다.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는 달려가 역시 빈무덤을 봅니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심경에 대해서는 말이 없고 다른 제자는 "보고 믿었다."(8)고 말합니다.
왜 그는 비어있는 무덤을 보았을 뿐인데 믿을 수 있었을까요?
역시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빨리 알아차립니다.
더 빨리 핵심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마음의 기도」, 「관상기도」를 사랑의 기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서 사랑은 어떻게 자라날까요?
1. 사랑이신 하느님, 사랑으로 육화하시고, 사랑으로 목숨까지 내어놓으신 예수님 곁에 머물러야 합니다.
2. 기도 안에서 사랑을 깨닫고 받는다면 삶 속에서 사랑을 살아야합니다.
그런데 삶 속에서 사랑을 사는데에는 거쳐야할 과정이 있습니다.
죄와의 투쟁입니다.
다른이의 허물과 부족, 나의 허물과 부족이 고통을, 죽음을 불러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 때문에 겪어내셔야 하셨듯이 말입니다.)
이 때 아버지께 대한 사랑과 신뢰로 내가 '죽는 밀알'의 길을 가느냐 아니면 대상을 죽이는 말과 행동으로 뻣뻣하게 살아있을 것이냐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 선택도 넘어짐을 거듭하면서 주님께 되돌아가는 기도로 얻습니다.
이는 죽고 부활하는 것이며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2,20)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골로3,1-4)라는
오늘 제 2독서의 말씀처럼
위를 바라보고, 생각하고, 추구하는(우리의 기도가 이것이지요) 이유는 죽고 부활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입니다.
내가 죽고 부활하는 삶을 살지 않고서는
주님 부활도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