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며 철저한 율법 준수와 죄에 대한 경멸에 가까운 의인으로 살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의 존재는 대단히 특이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자신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고 또 상대되는 다른 어떤 무리에도 들지 않으신 예수님은 아무리 살펴봐도 나자렛이라는 고을의 이름과 목수였다는 것 외에 알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던 예수님. 그런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이 보고 싶었던 것은 어떻게든 예수님의 거짓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예수님이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믿고 싶어서 증거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의심에서 출발해 그 의심을 굳히기 위한 증거를 얻기 위해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님은 바리사이와 비교할 수 없는 분이지만 그날 그 때에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지극히 평범한 분이었습니다.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행복선언으로 시작된 한 주간 우리는 어떤 자격이나 자리를 통해 권위를 확인하고 사람을 인정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평범이라는 말은 결코 평등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으로 사용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 이의 입에서 나오는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가 백성 안에서 자신들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하느님과 연결시키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은 '선생님'으로 불리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선생님이면 그들이 인정할 수 없는 이들은 모두 지극히 평범한 하느님과 먼 거리에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속에서 예수님의 정체를 의심하고 추궁하는 이들의 모습은 익숙하지만 쓴 웃음을 짓게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서글프기도 합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에게 이런 요구를 한다면 우리는 곧장 비웃음을 사며 그 자리에서 욕을 듣고 추방당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을 보며 그들은 뒷담화를 했을 겁니다. 예수님의 뒤편에 이어지는 그분에 대한 저주섞인 비난과 조롱이 들립니다. 예수님에게 단 하나의 자격이라도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비난하는 이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는데 쓸모있는 자격 하나 가지지 못했음이 순수함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모자란 하느님의 뜻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처럼 자격과 권위를 좋아하는 시대에는 더욱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무런 자격도 가지지 않았던 평범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늘나라를 희망하는 중입니다.
의심하는 이에게 예수님이 표징을 보여주지 않으신 것을 보며 믿어야 표징을 볼 수 있다는 식으로 다가가지 않길 바랍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표징은 보여줘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람이라 스스로 생각했으나 하느님의 말을 전하고 실천하는 이를 보면서 의심했던 '고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고, 그리고 평범한 거의 모든 사람들 사이에 살아가셨음보다 더 확실한 표징이 어디있겠습니까? 우리보다 더 나은 것에서 표징을 찾는 이는 전혀 볼 수 없는 진짜 표징은 당신이고, 그런 주님이 떠나심보다 더 무서운 경고는 없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주님의 표징을 청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청하는 사람 중 주님의 참 권위와 진리를 지닌 사람들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혹여 그들이 바리사이들 중 하나라면 그에게 주님이 함께 하실지는 더욱 궁금합니다. 복음을 보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