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에파타!"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이 주인공으로 삼은 사람은 '청각언어장애인'입니다. '농아'로 불리는 사람들은 들을 수 없으므로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장애인에게 가장 중요한 소리를 주님은 그에게 선물로 주신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소리를 내어도 자신이 들을 수 없는 사람이기에 사람들과 통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전무합니다. 사람들은 손짓 발짓으로 소통이 가능하리라고 보지만 지시하거나 눈에 보이는 것 외에 우리는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물론 어떤 의미를 물을 수도 가르쳐 줄 수도 없습니다.
같이 생겼고 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이 오늘 주님 앞에 섭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를 데려 온 사람들은 그에게 손을 얹어 우리처럼 말을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했을 겁니다. 우리가 답답한 것은 그가 듣지 못한다는 것보다 말하지 못하는 것에 더 관심이 가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농아인들 대할 때 그가 말을 할 수 있는가? 혹은 우리처럼 교육이 가능한가를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보통 사람들에 근접할 수록 '똑똑하다'라는 말을 써가면서 사람들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 세상의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은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들이 알아듣는 것으로 세상을 알려야 하고 일상적인 것부터 모두 공유할 수 있어야 '함께 하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장애가 보편적인 삶의 희망을 가지지 못했던 시대. 예수님이 장애에 대해 어떤 것을 아셨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모습은 신기할정도로 충분히 감동적입니다. 우리의 눈이 아닌 농아인의 눈에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하나 질문을 해 봅니다. 아 사람이 "에파타!"라는 말을 들었을까요? 그리고 그 뜻을 알 수 있었을까요? 어쩌면 예수님의 이 소리는 주변의 사람들에게만 소용이 된 소리였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그의 귀를 여시고 말문을 여신 것은 그분의 손가락이 닿는 그 순간이었을 겁니다. 적어도 한 사람을 온전한 사람으로 여긴다면 예수님은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그분의 손으로 이미 하신 후 다른 모든 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 다음에 소리를 내신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예수님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은 농아인이 아니라 그 일을 본 모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이 사람은 처음으로 듣는 소리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말로 배워 익혀야 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주변의 사람들은 그에게 새로운 것에 대한 소리를 가르쳐야 했을 겁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세상을 배웠고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소리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그래서 소리가 없는 이들에게는 소리가 아닌 그들이 알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수어' 혹은 '수화'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의 '한글'과 함께 우리 모국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같은 이유로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수어는 말이고 소리가 없는 이들이 세상과 소통하고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이 수화나 수어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하는 것이 수화임은 분명합니다.
언젠가 그들에게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은 수화로 인사하실 것이라 말한 적이 있습니다. 겁도 없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늘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 함께 살아갈 마음이 있을 때 모든 것이 변화합니다. 우리가 낼 수 있는 소리에 우리의 사랑을 담지 못한다면 그 소리가 없어서 불편을 침묵 속에 느끼며 살아야 할 사람들에게 미안함의 몫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아직 농아인들에게 '에파타'에 담긴 희망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리가 아닌 보이는 말이어야 그 의미가 살아납니다.
생각할 수 없는 시기에 예수님의 행동이 알려주는 사랑의 모범을 기뻐합니다.